금 1달란트는 은 1달란트의 15배 정도이고, 은 1 달란트는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드라크마)로 6,000 데나리온 정도라고 한다.(성경에 나오는 단위의 객관적 중량이나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요즘도 휘발유 1리터의 가격이 매일 다르듯이 가치란 그때 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노동자 품삯으로 환산하면 금 1달란트(비유에 나오는 달란트가 금이라고 칠 때)는 90,000일의 품삯인데 그것의 만 배인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을 (의미 없지만)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9억일(약 246만년)에 해당하는 품삯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한 개인이 질 수 있는 빚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빚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이고 죄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빛을 밝힐 목적을 가지고 전구를 샀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 전구는 주인의 의도와 목적인 빛을 밝히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만 달란트는 자신이 빚을 질 수도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을 갚지 않은 죄를 지었을 때 갚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가지지 못함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갚지 못하여 주인에게 불려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저 버리고 자기가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지 못하는 존재임에도 스스로 삶의 목적을 정하고 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말한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잃어버리고 사는 모든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빌릴 수 없듯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가질 수 없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떠나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고 사람을 심판하며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떠난 죄에서 일만 달란트를 갚을 수 없듯이 스스로 죄에서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생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이를 용서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사했다는 것이다. 죄를 사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진 빚, 곧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 그것이 의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자 존재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삶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회복한 사람이 세상(주인의 집 밖에서)에서 만난 자기 동관, 곧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자신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은 자의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정체성 자체가 회복 받은 사람이 지은 갚은 수 있는 빚, 곧 존재의 죄가 아닌 행위로 범한 죄를 심판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의와 생명이 있으면 그 의와 생명으로 인하여 행동이 나오는 세계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죄와 행함의 죄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초인간적인 죄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죄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것을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라는 정체성의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 행함으로 지은 죄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간첩이라는 신분을 면하게 하여 자유 민주주의 국민으로 사는 시민권을 주었더니 자유가 좀 지나쳐 술 취하여 길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을 패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의 죄, 인생이 왜 사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겪는 불편함을 심판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 시작은 베드로가 와서 '형제를 몇 번 용서할까요?'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죄라고 하면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것과 작게는 이웃에게 욕을 하고 교통 법규를 어기고 또 사람을 때리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런 것은 물론 죄지만 단언컨대 그런 죄 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절대적인 기준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기대하신 사람의 삶의 목적이 그 사람에게 있는지 아닌지를 보시는 것, 그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사람이 생각하는 죄가 있다. 하나님은 정체성이 기준이고 사람은 행위가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 생명으로 사는지가 기준이고, 사람은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한 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안에 대하여 사람들은 의견이 늘 분분한 것이다. 특히나 죄의 경중에 있어서는 자기의 기준에 따라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고, 일백 데나리온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일만 달란트는 정체성에 관한 죄의 기준이고, 일백 데나리온은 사람의 행위를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한 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행위를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의 행동은 기준에 따라 늘 죄가 되기도 선이 되기도 한다. 다만 그것을 누가 하느냐의 문제이다. 군인이 전쟁 중에 사람을 죽였느냐? 아니면 설사 흉악한 죄인이라도 복수하듯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였느냐가 다른 것이다. 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죄의 기준이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느냐가 더 본질 적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반면에 사람은 늘 행동으로 죄를 범한다. 그런 행함의 죄를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사회와 이 세계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적어도 이 사회에 있는 모든 것 그 어떤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 정도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순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존재 목적을 주셨는지를 회복하는 것이 본질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범하거나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에 따라야 한다. 벌을 받고 사과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사람에게 행함으로 지은 죄를 사과나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사회가 정한 법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사회의 법과 우리의 머리카락 수 까지도 그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낮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삶은 의인이 죄인의 주장에 따라 죄인이 되는 삶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기 뜻대로 살아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해를 입히는 것을 감당하는 삶이다. 그런 삶이 일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는 삶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신의 삶의 목적임을 아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겠는가? 일백 데나리온 빚질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을 가진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다. 그래서 육신을 가진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져가는 사람이다. 즉 세상의 법으로 범죄 한 것이나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은 생명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대로 사죄하고 벌 받고 사과하는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특히나 종교인들이 후자를 하나님께 사함 받았다고 안 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죄 사함 받은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육신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어디에 쓰셨는가? 죄인들이 의인을 죄인 취급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에 재물로 주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시끄럽고 또 죄에 대하여 왈가왈부한다. 한 마디로 육신으로 감당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것에 신앙을 핑계 삼기 때문이다. 육신을 주신 것은 사람들이 선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죄인 삼을 때 죄인 되고, 또 육신이 한 행동(예수님의 경우 유대인 앞에서 한 말과 행위들)에 대한 시대의 법률이 정한 죄를 받는 것에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육신으로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말하는 죄도 사해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육신은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모두가 자신이 지은 것도 시인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숨기고 속이려 한다. 그래서 세상이 시끄럽다. 기독교인들은 특히나 더 그렇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종교적인 이름으로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정말로 제대로 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인데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일만 달란트 빚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이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로서 사는지를 보이신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삶을 목적을 깨닫는 것은 일만 달란트 곧 자신의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체성이 회복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것과 같이 세상을 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에게 또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이 그것인데 어떻게 다르게 살겠는가? 인간의 DNA를 가지고 고래처럼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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