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회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두 교회 모두 다른 교회에 비하여 말씀의 계시가 밝고 성도들 간에 친밀도가 아주 돈독하여 그야말로 성도의 교제가 생활인 교회이다. 그 중 A교회는 목사님이 연세가 80이 다 되셨고 B교회는 목사님의 나이가 60에 들어섰다. 어떤 교회나 그렇듯이 교회의 방향과 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 때 두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달랐다.


A교회는 목사님의 연세가 고령임에도 그 성도를 멀리까지 찾아가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듣고 밤을 새워 대화를 했다. 또 다른 사람이 교회 안에 성경적이지 못한 말들을 하고 다니는 것에 있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성도들이 찾아와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전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려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했더니 성도들이 점점 불어나고 또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점점 하나가 되었다. 특히 특징적인 것은 목사님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 한번은 교회 안에 어떤 다른 의견이 있을 때 목사님께서 어느 한쪽에 동의하는 것 같은 의견을 밝혔던 것을 교회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


반대로 B라는 교회는 좀 달랐다. 교회 안에 뭔가 잘못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으면 목사님이 그 사람이 없는 사적인 자리에서 성도들보다 먼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대상이 되는 사람을 찾아가서 대화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들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교회에서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것이 있다 싶으면 시체에 독수리 모이듯 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일상을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는 사례들이다. 이 두 사례가 이 말씀의 내용을 거의 설명하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로 비교가 된다. 성도, 곧 형제를 얻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 길래 이 말씀과 함께 있는 것일까?


7,80년대 한국교회는 부흥의 시기였고 많은 개척교회들이 이 말씀에 의지하고 또 이 말씀을 많이들 나누고 또 믿었다. 물론 이 말씀이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믿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지 그런 이유로 있는 것이 아니고,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정체성이다. 특히나 유대인들은 한국이나 이런 나라와는 좀 다르게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보이는 성향을 이름으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바요나(요나의 아들)' '보아너게(우뢰의 아들)'과 같은 이름들이 있었다. 이런 것은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1990년에 개봉된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인디언들의 이름을 보면, '주먹 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 새', '머리에 부는 바람', '열 마리 곰'과 같이 그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그 이름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뜻하는 교회라는 간판 아래 모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정체성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보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자'하고 모여 있으면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서로 보증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모임은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모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죄를 범하였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가 있으면 멀리 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죄가 있거나 힘든 이를 찾아가서 위로하는 자들까지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죄인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 지은 형제를 찾아가서 권면하는 것은 죄 지은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은 모습이다. 


또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십자가 밑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을 듣는 것이 이 땅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두 사람을 데리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두 세 사람 모이면 그 모임은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모임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죄 지은 형제를 찾아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육신을 주셨으므로 이 육신이 수고하여 찾아 가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몸만 가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것도 죄 지은 사람에게 간다는 것은 죄인에게 간다는 것이다. 죄인은 당연히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고, 이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죄 지은 형제를 찾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는 모습으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두 사람이 같이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또한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 사람이 바로 함께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 또한 죄 지은 형제 그 역시 하나님 아들의 모습으로 회복 될 수 있다는 증거로서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리스도 인하여 회복된 증거인 사람이 함께 했음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 보이신 그 생명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증거를 보이고 죄 지은 자가 잃어버린 길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리고서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사람이 할 일이기도 하다. 즉 땅에서 매어야 하는 일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죄인을 찾아가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우리가 매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매는 것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은 그것이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땅에서 매는 일과 하늘에서 매이는 것이 연관이 있기 때문에 땅에서 맬 때 하늘에서도 매이는 것이지 전혀 무관한 것이라면 그럴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은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 곧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을 떠난 자리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즉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는 것이다. 왜 사는지 잃어버린 사람에게 길과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죄인을 찾아 가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함께 한 곳이 교회다. 그리고 그렇게 죄 지은 형제를 찾아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 모임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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