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여러 복음서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생각은 지극히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크고 작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피라미드를 세우는 가치관이고, 또 얼마나 인간이 본성을 넘어서도록 스스로를 제어했는지에 대한 상대적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의 대표적인 표현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와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사람의 신앙이 더 좋은 신앙인지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자기 그릇만큼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신앙"이라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역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역량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그릇, 곧 기대하는 바에 맞게 살면 그것이 가장 좋은 신앙인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고린도서에서 바울 사도가 몸의 신체와 교회의 여러 직분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상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답변을 하셨는데 그 답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답변을 하셨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어른 앞에서 어리다고 겸손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는 자기를 표현함에 있어 그 생명의 본성 이외의 다른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어떤 공로에 대한 대가를 바라듯이 부모나 어른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가지고 싶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어린 아이가 때로 부모에게 자신이 수고하면 어떻게 해 달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러다가도 정말로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보면 그 순간에는 자신의 공로가 어떻고 또 상대적인 차이를 내세우면서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지고 싶은 마음 그대로를 표현한다. 즉 자신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어떤 사람을 애기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어떤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문화에 종속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그런 표현을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 덜 먹은 것을 말할 때 어린 아이 같다고 한다. 바로 그런 기준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이다. 즉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기준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인정받기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은 안목이나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질문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답변은 "그런 질문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다."라고 답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왜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괜히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제자들이나 지금 이 시대에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같은 생각이다. 그것은 큰 자는 곧 대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을 어떤 기준에 의하여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상이 가진 피라미드적인 가치관(상대적 존재 비교를 하는)과 또한 얼마나 인간의 본성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고 공로를 세웠는지 하는 것과 또한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수고하고 공로를 세우고 또 소유를 드렸는지를 따지고 그것에 맞게 천국에서 대접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차이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하면 더 큰 사람이 되고, 그런 차이에 따라 당연히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법은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접을 하는지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천국은 누가 더 대접을 받는 큰 사람이냐를 논하는 곳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영접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 곧 누가 더 큰지도 따지지 않고, 세상의 공로나 소유의 드림과 같은 것의 차이에 따른 다른 대접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의 나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과 다르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끔씩 어린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에게 이야기하기를 "아기는 아프지 않고 편찮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한마디로 아이는 늘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신이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어리고 모르고 미숙하며 어리석은 생각과 가치관을 받드는 것이 바로 천국의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순순히 끌려가셨다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어린 사람을 사뭇 가르치려 하고, 또 실수하고 때로 죄를 범하는 것을 심판을 하고자 하기는 해도 어린 아이를 키우듯, 또 그 응석을 받아 주듯, 또 기저귀 갈아주듯 신앙이 어린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감당해 가면서 살려 고는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것을 예수님께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큰 사람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이들과 다르게 대접을 받고 또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것만 생각하지만, 아이는 실제로 어른이 가르치는 것 같지만 받들고 영접하듯이 하지 않으면 온전한 교육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천국에서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 사람을 어른, 곧 큰 사람이라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천국의 법은 십자가의 법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전한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죽으신 법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큰 자 곧 어른의 모습이다. 그리고 신앙의 장성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신앙이 자라면 대접을 받고, 무엇보다 강도권과 같이 큰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이 큰 사람이고 어떤 것이 장성한 신앙인지 모르는 것이며, 무엇보다 천국의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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