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시장하시므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으려 했는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에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그 나무가 말랐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 사건이 있던 시절이 무화과의 열매가 열리는 시절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직 제철이 아니라서 열매가 열리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왜 저주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왜 무화과가 말랐는지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보면 난데없이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답을 하신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시는 것이다. 상황 자체가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아 보일 수 있다.


무화과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나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때 잎사귀 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무화과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의 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무화과에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시려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나무의 열매와 같은 하나님은 없고 잎사귀와 같은 형식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제사 드리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없으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며 성전에서 제물을 사서라도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또한 당시의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른 체 율법의 형식만 지키고 있으므로 그런 신앙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열매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이렇듯 하나님의 의는 없으면서 의가 표현된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공생애 내내 말씀을 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나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외식에 대하여 경계하시는 모든 것의 방점이 바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오래된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시대적으로 아담이 범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익히고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인생을 지으시고 너무 기뻐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양을 감추려 한 것이다. 이유는 이런 모양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신앙과 관련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모습이 달라진 것 그것에서 신앙이라는 것도 성경이라는 것도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 또한 그렇다. 다른 것이 천지창조가 아니라 육신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시작이 바로 하나님 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전에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육신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생긴다. 하나는 부족한 육신을 보완하기 위하여 육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적인 신앙이다. 율법이라고 한다고 하니 십계명이나 유대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라도 그것을 지켜 행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려 한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행동규범으로, 또 부자 청년과 같이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 지로 접근하는 모든 생각이 다 율법죽의적인 신앙이다.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은 영지주의다. 즉 율법주의가 내용은 무시하고 형식만 취하려 하였다면, 영지주의는 내용만 취하고 형식은 버린 것이다. 이 영지주의는 예수님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들의 육신의 모습을 수용할 수 없자, 육신에 대한 가치를 저 버린 것이 영지주의다. 즉 영지주의는 시대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만연한 생각이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다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내용이자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라는 형식 안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즉 그렇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러 이 땅에 오셨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 중에 어떤 하나씩을 부정하는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는 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꼭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행위로만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외식의 상징인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시장한데 열매도 제공 못하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주림은 육신의 주림이 아니라, 열매,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인 사람을 보는 것에 주리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는 그런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다는 것은, 아담이 사람의 모습이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사람을 가리듯 스스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온갖 율법을 지켜내는 것으로 신앙의 전부를 삼는 이들 뿐인 것이 바로 잎만 무성한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마르게 하시는 것을 본 제자들이 '왜 그러셨나요?' 묻는 것은 당연히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믿음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므로 그 사람이 열매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수동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먹을 수 있는 상태로 결실을 맺는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니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없으면서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만 잎이 무성하듯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고, 외식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것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하셨다. 물론 믿음이 있고 산을 뽑아서 바다에 던지는 것을 보이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상황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말씀은 더 깊은 뜻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은 율법이 선포된 곳이다. 또 산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율법을 자기 안에서 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율법을 세상과 같은 바다에 던져 버린다는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율법이 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있으면 믿고 구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도 결국은 사람에게 모든 것, 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존재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돈 필요할 때 기도하면 돈 생기고, 시험에 붙을 것을 믿으면 시험에 붙는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이 필요하고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좋은 배우자가 필요한 상황 자체가 이미 불완전한 상태고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믿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일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늘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 사람에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열매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장하심을 채울 수 있는 열매고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가 이루어졌다면, 그 존재는 무엇을 해도 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