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가서 지내다가 포도원의 소득을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세를 준 농부들이 종을 죽이고 돌로 치고 또 다시 종을 더 많이 보내도 그렇게 하니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악한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자!'며 아들을 죽였다는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이 비유는 당시에 듣는 바리새인들조차 자기들의 이야기인 줄 알 정도로 명확한 내용인데 이 내용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두 내용은 쉽게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악한 농부에 비유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가 볼 때 전혀 쓸모없을 것 같아서 버린 돌 정도의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건축자가 가진 기준으로 볼 때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준에 관한 것이다. 건축자는 집을 보기 좋게 짓는 사람인데, 그가 가진 건축의 기준으로 볼 때는 버리는 것이 마땅한 돌이지만 집 주인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주 곧 집 주인이 아니면 자기 집에 머릿돌을 정할 사람이 없으므로 건축자가 버린 돌이 머릿돌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집 주인의 뜻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주인과 건축자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하나님도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비단 바리새인 뿐 아니라 지금의 많은 종교지도자들과도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이렇게 싸잡아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나 예수님 당시나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많은 신앙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려 하고, 같은 맥락에서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선히 여기신 결과라고 보는 것 등은 다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경건하게 믿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이 그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신앙의 성공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절대로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엄연히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 눈에 예수님이 보잘 것 없이 보인 것은 당시 가치관을 기준으로 볼 때 세상에서 예수님이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도원의 주인과 세를 받은 농부들은 포도원의 소득에 대한 가치관이 달랐다. 농부는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을 죽여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엄연히 그것은 포도원 주인의 것이다. 그것과 같이 예수님에 대한 관점도 하나님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달랐다. 포도 소산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는 것이다. 포도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포도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은 다시 포스팅할 예정.)


포도 곧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포도원의 주인과 세를 받은 농부가 달랐듯이 하나님과 바리새인들과 명확하게 달랐다. 종교적인 경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죄인과 창녀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관습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수고를 목숨 걸고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아무리 양보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꾸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니 그들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포도원에서 세를 받은 농부들은 자신들이 수고하여 포도를 얻었기에 그것이 자기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즉 수고의 결과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적 규례와 관습을 지키는 공로와 행함의 결과로 포도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공로가 그리스도가 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의 포도는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밭을 일으키고 포도를 심었기 때문이지 세를 받은 농부가 수고한 결과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종교적인 규범을 수고하고 지켜내는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라는 의를 가지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일구듯 사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은 수고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키는 종교적, 율법적인 규례를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메시야는 자기들이 목숨을 다해 지켜내고 있는 율법 행위의 공로의 연장선상에 계시는 것이지 예수님과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행위도 공로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를 받은 농부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들이 포도 곧 그리스도의 세계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만연한 가치관이다. 공로와 수고가 없고, 교회에서 또 종교적인 업적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거나 간다고 해도 말석에 갈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생명으로 인하여 표현된 성품이지 행위로 쌓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공로나 업적이나 또 세상에서 유력하지 못한 모양으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은 건축자가 볼 때 아름다운 건축물에 사용할 수 없는 돌과 같이 여기고 버리지만 집주인인 하나님은 그 돌을 모퉁이 머릿돌과 같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달랐듯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것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의(義)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를 받은 농부들의 수고나 바리새인들이 쌓은 종교적인 공로나 또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공했다고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본 모습 그대로에 원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인간 그 원래의 모습 그것에 있는 것이다. 포도원의 모든 포도가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일굴 때 이미 있었던 것처럼.


세리와 창녀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상에 다 노출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마치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 앞에서 감추지 않고 나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가진 다양한 본성과 마음들을 종교적인 규례를 지켜내는 것으로 감추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모습으로 성전에 나오고 사람들 앞에 나오고 예수님 앞에 선 것이다. 마치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부끄러움을 감춘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너무 만연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돌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듯 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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