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오기 싫어하므로 자기 종들을 보내서 길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에 참여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불려오듯 온 사람 중에 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임금은 화를 내며 오히려 결박하여 내어 쫓았다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다. 이건 예전 가스펠송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소, 장가 가야하고 소도 사야하고…"하던 가스펠송이 바로 이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제법 유명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나라의 왕이다. 나라의 왕이라는 것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나라에 바라는 모든 바람이 육신으로 대변되는 존재가 바로 왕이다. 그런 왕에게 아들이 있고 또 그 아들이 혼인을 한다는 것은 백성의 모든 의를 가진 왕의 뜻이 다시 육신으로 나타난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이 결혼한다는 것은 그 의가 지속적으로 육신으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임금은 그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기에 잔치를 열었다. 잔치를 열었다는 것은 의가 육신이 되는 사건은 축하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에 속한 백성, 임금으로 표현된 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임금이 가진 의가 아들로서 표현되는 것이 자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잔치 보다 자신의 일과가 더 중요한 것이라며 자신의 일과로 떠나는 이유인 것이다. 한마디로 임금과 백성이 기뻐하는 일이 다른 상황이다.


혼인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말이 한 몸을 이룬다고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몸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는 남자는 항상 의와 내용을 가진 존재를 말하고 여자는 형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 마다 언급하지만 이것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혼인이라는 것은 형식과 내용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를 베풀고 우리를 신부로 부르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들과 하나가 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혼인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 그 혼인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의가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또 사람 안에 말씀의 씨가 심겨져서 생명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다 결국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되는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으로 나타내시려 하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남자로 늘 비유되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우리 인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그것이 혼인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이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청하러 간 종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이 혼인잔치가 예비된 것이라고 한다. 즉 이것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드실 그 때에 이미 예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계획은 어떤 이라도 잔치에 부르는 그 부름에 응하는 자라면 장가갈 일도 없고, 일할 밭이 없는 사람이라도 갈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포도의 소산을 자기의 시각대로 해석하는 것이나, 임금이 가진 의와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다 같은 존재들이고 같은 이야기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잔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혼인 잔치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잔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형식을 가진 존재인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잔치를 벌일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된 존재인 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잔치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과 하나 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자신과 같은 이들을 얻기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다. 그들은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다 있다. 자기가 장가가야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의를 가지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이다. 또 밭에 일하러 가야한다는 것이다. 즉 흙으로 만든 사람을 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농부이지 잔치에 청함을 받아야 하는 대상인 인간이 농부가 아니다. 즉 이 둘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임금이 보낸 종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임금, 곧 하나님께서는 장가갈 일도 없고 밭도 없는 이들을 불렀다. 그들은 바로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이들이다. 즉 자기가 옳다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옳은 것이 없으니 그 옳다는 것의 아들을 얻기 위하여 장가갈 일도 없고, 또 그 자신의 의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일할 밭도 없는 것이다. 즉 공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동의 대명사인 소를 살 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사람과 하나가 되는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의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오라해서 갔고, 또 사람 없다 하니 자리를 채워주었는데 그깟 예복이 없다고 결박하여 쫓아내는 것은 적반하장이 아닐까 싶지만 여기는 혼인 잔치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자리인 것이다. 즉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것이 표현된 사람들의 잔치라는 것이다.


군인이라면 자신이 가장 격식을 차릴 자리에 군복을 입고 간다. 즉 자신의 정체성이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잔치 자리에 예복이 없다는 것은 예복으로 표현될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는 행함이 없어 죽은 믿음인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의 격식을 갖추려 한다. 일요일이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면 두 손 모으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것은 교리로 잘 나타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심령 안에 술 마실 이유가 없어 마시지 않는 것은 속과 겉이 같은 것이지만, 자기 안에 술 마실 이유가 있는데 술을 참고 마시지 않으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예복이라 할 수 있는 신앙의 관습과 모양과 또 신앙인으로서 경건하고 세상에서 볼 때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사는 생명이 그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살 때 진실된 것이지, 그렇게 할 때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참고 억지로 하는 것은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한 바리새인과 같이 자신들도 다른 사람과 같이 연약하고 악한 것이 있음으로 종교적인 관습으로 자신을 치장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또 예복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할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가 아니라서 '멍멍'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가치관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고, 또한 예복으로 표현해낼 생명이 그 안에 없는 것, 즉 군인이 아닌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 비유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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