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세는 출애굽기 30장에 나온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출 30:13)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받으러 온 이들이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이 왜 세금을 내지 않느냐?' 물으신 것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임금이 자기 아들에게 세금을 받느냐고 물으시고 그렇지 않다는 베드로의 대답에 당연히 아들은 그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하시고, 바다에 가서 낚시한 고기가 한 세겔을 물고 있을 것이니 그것을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로 내라고 하셨다.


임금의 아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세금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금이라는 것은 함께한 나라의 일을 위하여 내는 것이고, 성전의 세금이라는 것은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내는 것이 성전세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전세를 내는 것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을 전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런 목적의 세금을 내실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세금을 내셨다. 내신 이유는 <오해 받지 않기 위하여>라고 하셨다. 오해 받지 않기 위함이다? 이것은 뭔가 나약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도 결국은 오해 받지 않기 위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하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 성전세와 관련한 오해와는 전혀 다르지만.


이 오해 받지 않기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또 세금을 내시는 모습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말씀이고, 또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신분을 가지고 계셨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군사를 동원한 이들에게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 무찌르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시지만 십자가에 끌려가신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적 정체성(물론 그것이 영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육신을 가지신 삶으로 표현되었다.)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괜히 시험을 받거나 심판을 받거나 조롱을 받거나 죄인이 될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시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 세상에서 그 분께 시비를 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은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그런 일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이것을 망각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면 늘 "어디 감히?"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마음으로만 생각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강력하게 그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탄의 생각이라고 지적하거나 또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좀 고상하기는 하지만 그래 몰라서 그러니 불쌍하다며 측은하게 여기는 것 까지 다양한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모르는 이를 위하여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안 됐다, 고시다는 식의 생각을 말한다.)


신앙이라는 것, 특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보여서 압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니까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잘 되어서 유력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부자가 아닌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하나님을 믿어라'(이런 것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낳았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의 어리석음이나 측은함을 대하는 것은 너에게 없는 하나님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얻게 된 유익을 미끼로 유인하거나, 아니면 그 차이로 차별하고 무시하거나, 아니면 적선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에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하여 살아가는 신앙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인간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면 당연히 절벽이다. 그런 사람의 모습을 비난하고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짐승 같은 이들은 복음을 잘 못 알아듣더라.'며 자신은 신앙을 가졌기에 복음을 이해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그런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 영광이라 서로 나누는 것이 교회 생활이라고 하면 그것은 반쪽이다.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이 예수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삶이 영광스러운 것은 맞지만 그렇게 나누라고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그 은혜, 남이 알지 못하는 그 은혜가 영광이 되려면 그것을 알지 못하여 절벽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지듯 수고함으로 그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삶의 목적을 회복하고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때 받는 영광이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고 그것으로 인하여 누리는 것은 누리지 못하는 이들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영적인 축복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알도록 아는 자가 수고하라고 주신 은혜인 것이다. 그 수고가 열매가 될 때 온전한 영광이요, 그런 수고가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신을 믿는 신앙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의 절대적 차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