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볼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그와 연관된 종말론적인 신앙은 종교를 떠나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 종말론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끄는 바탕에는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을 행동 수칙처럼 지키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들도 모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혹은 사람이 그 육신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 그것만이 재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그 기록된 말씀 자체가 온전히 이루어진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라면 바다가 갈라진 것이고 또 갈라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실 때는 바다를 가르는 것 그것 자체가 목적이라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믿고 지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지키는 것이 그것을 보이게 하는 본질을 지키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을 지킬 수 있다면 표현은 본질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유전자가 있으면 당연히 보이는 모습과 생각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사람의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지키는 것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므로 분명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신 본질의 표현으로 어느 시절인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인식 세계 안에서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억지이고 괴변이다. 이미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 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이들 중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다.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예수님이 틀렸거나 아니면 예수님은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이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예수님은 틀리지 않는 분이시므로 사람들이 다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만희나 여타 이단 종교의 교주들로 오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믿는 것은 한마디로 똘아이일 뿐이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보길래 그런 것을 주장하고 믿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에게 모든 것은 의미에서 시작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에서 보듯이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게 다가오고 꽃이 되었다고 한 것과 같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주님이고 그리스도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선지자 중의 한 명일뿐이었고, 가룟유다에게는 그냥 한 스승일 뿐이었으며,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 또 반역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 땅에 전하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면 그 사람에게 그 마음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에게 구주로서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 인간인 자신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 그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의미가 있어진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그것을 기록한 말씀을 또 읽고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과 의미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진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을 일컬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 다음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인생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뜻과 의를 깨달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아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나중에 교회를 다시 오신 주님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은 교회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마음에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란 그 사람 안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또 그 생명이 삶을 주관하는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났다는 것은 그 만난 사람이 다시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a christ)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에 교회를 만나는 것,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교회로 모이는 사람,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생명이 또한 예수님의 생명과 같이 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며, 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들고서 만나도 교회가 아니며, 또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의가 자신에게 의로운 것, 옳은 것으로 의미가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인문학에서 길을 찾는 의미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금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셔도 예수님이 오신 뜻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그냥 행인일 뿐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뭔가 허전하다. 그 복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과 같은 것이라면 좋은데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언론에서 유명인이 돈을 좇아가는 기사를 보면서 욕하기도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지는 이유까지 모든 것이 육신 사는 동안 잘 먹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가끔씩은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한탄하면서도.


인생은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이든 재력이든 어떤 것이라도 그건 다 부질없는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에 부자 되려고, 아니면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아니면 좀 고상하게 꿈을 이루려 살려고 라며 말하지만 그런 것은 다 삶의 본질이 아니다. 삶의 본질은 이 삶을 창조한 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의 모든 기능은 생산자가 소비자의 성향에 따라 만든 것이지 그 기능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사람이 그것은 알면서 이 육신의 삶의 본질을 육신의 어떠함에 두는 것을 두고 소경이라고 또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 볼 때 죽은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법률적인 죄악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람이 살면서 어길 수도 있고 지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기면 그 시대와 나라의 법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 믿는다고 그런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소리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하여 죽으신 분이 아니기도 하지만, 정작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 시대 사람들이 정한 법에 저촉된다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을 천사의 힘을 빌려 피하지 않고 담당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육신으로 시대적인 요구를 충족치 못한 것에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또 그 근거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가치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그 육신이 가진 삶이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육신으로는 안 된다는 가치관에 의해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 십자가이다. 


그런 십자가의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가 육신의 죄를 이기고 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부적쯤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안목과 가치관이 가진 예수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는 사람일수는 있지만 다시 오신 예수님도 메시아도 그리스도도 또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 그냥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부적으로서의 의미 밖에 없다.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전하시는 말씀으로서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말한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만드실 때 두신 뜻과 같이 연약한 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생명과 사랑을 표현하시기 위함임을 아는 것이 바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적인 내용은 다 표현되기에 그렇게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미로 다시 오신 예수님은 언젠가는 약속과 같이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실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보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하나님이 정하신 의미로 만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런 의미가 없다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인터넷으로 또한 위성으로 생중계를 해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그냥 이슈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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