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13-20 베드로의 신앙고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7. 15:59 Writer : 김홍덕

요즈음은 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물고기 모양을 차 뒤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것은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익투스(ἰχθύς)라는 단어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단어들 첫 스펠을 모은 것과 같아서 이 베드로의 고백은 익투스로 상징되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핍박 받던 시절 기독교인들의 상징과 암호이기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 16:16)


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사람들이 이르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더러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가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사실은 믿노라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또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 살 동안 복 받는다는 것 그것이 믿음과 관련된 정의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결과와 효과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무엇이 믿음이냐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고백 자체로도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고백의 과정,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물으신 물음과 어우러졌을 때 제대로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좀 어렵게 말하면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더욱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베드로가 고백하는 그 순간, 예수님을 주로, 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신앙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이 칭찬해마지 않았던 것은 지금 이 시대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에 또 그 당시의 사람들 눈에 한낱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한 남자, 가끔씩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것은 선지자들도 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선지자라고는 할 수 있는 그냥 그런 한 사람, 또 한편으로는 세금도 내지 않고, 율법도 무시로 어기며, 가난한 사람, 죄인 그리고 창녀와 세리와 밥을 먹는 그런 한 사람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라고 했던 것은 그들 마음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성경에 대하여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나 때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 사회와 역사 속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보였던 것이고, 그리고 세례 요한도 천국의 복음을 전파했기에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선지자로 보였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주나 메시아(그리스도)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는 대로 사람을 대한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그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늘 '선생이여'라고는 불렀을 뿐 <주>로 부르는 경우가 없었다. 그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은 선지자로서의 의미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로서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겼다면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유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먼저 주라 칭하고 또한 그 자신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베드로의 마음과 같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정체와 본질 역시 그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블로그의 제목을 <성경은 나의 이야기다.(Bible become My story!)>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예수님은 나에게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밥 먹고, 창녀와 매국노 같은 세리와 놀고 때로 성경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면 그를 주로 또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에게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기에 예수님이 보실 때 너무 귀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육신의 연약하고 고상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했을 때, 그럴 수 있는 사람의 고백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또한 신학박사가 아니고, 또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때로는 고상하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존경받지 못할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지금 신학(신앙이 왜 학문이 되었는지 알 수도 없지만)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또 잘 차려입고 또 훌륭한 조명과 음향시설을 갖춘 높은 강대상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닌 성경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방법으로 변질시킨 설교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상에 찌들어서 살아가는 중산층 이하의 삶을 살면서 때로 법도 어길 수밖에 없고, 또 때로는 욕도 하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거나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용납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의 가치관이 그렇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고, 그런 고백을 상징하는 것을 차에 붙이거나 자신의 종교의 대표성으로 표시할 자격이나 믿음이나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한낱 목수의 아들이고 때로 세금도 못내는 가난한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안다면 교황이 왜 있으며, 교회를 왜 화려하게 지을 것이며, 또 목사를 청빙하는데 왜 학력을 보겠는가? 그러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우러져 사는 거저 평범한 사람, 신학을 몰라도, 높고 좋은 강대상에 오르지 못해도, 또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영광이라고 할 것이 전혀 없고 성공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이 대하고,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또 그 중에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미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나 베드로 눈에 또 당시 유대인들 눈에 비친 예수님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메시아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음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제사장의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로마 황제의 옷을 입은 것도 아니라 베드로와 유대인들의 눈을 볼 때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가 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 평범한 인생들, 피라미드의 하층에 있고, 상대를 이겨야 승자가 되는 세상의 법에서 패자와 죄인이 된 사람들, 그런 인생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사는 꼴은 그러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대하듯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된 사람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졌다면, 또 신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단언컨대 베드로의 고백은 그들의 고백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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