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32-39 사천명을 먹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6. 16:37 Writer : 김홍덕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 이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병이어는 같은 사건인줄로 안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왜 두 번씩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 사건이 같다고 착각하는 것 보다, 비슷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었다는 것이 더 의문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4,000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병이어는 우선 상황이 다르다. 오병이어는 날이 저물고 장소도 비어 있는 들이었다고 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하루는 날이 저물 때부터 다음날 날이 저물 때까지이다. 그러니까 지금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작은 아침이지만 유대인들에게 날이 저물었다는 것은 한 날이 가고 새 날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병이어에는 날이 저물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죽고 난 다음, 그러니까 사람들의 신앙의 여정이 율법적인 것을 좇던 신앙에서 그것이 떠나고 난 빈들과 같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날은 예수님께서 떡과 고기를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먹은 사람들에게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육체를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기 시작하는 날은 분명히 새로운 날이다. 그것을 고린도서에서는 구원의 날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이것을 달력의 날짜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다.) 신앙의 여정에서 율법적인 신앙, 곧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생명의 세계를 알게 되는 순간이 시작되면 날이 바뀌는 것이다. 즉 다른 날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날이 바뀌는 것을 유대인들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로 표현하는 것이다.(창세기에서도 그렇게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오병이어에서는 먹고 남은 것, 곧 그것을 먹은 결과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오병이어를 포스팅 할 때 밝힌 바와 같이 12는 나라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교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는 한 개인의 신앙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라의 신앙이 되는 그 풍족함에 대한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고 난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이고, 빈 들이고, 또 날이 저물고, 또 회복을 의미하는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그 회복된 이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신 것은 우선 배경이 좀 다르다. 이 기적은 우선 사람들이 사흘을 굶었다고 되어 있다. 그들이 굶게 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을 듣고 함께 하느라 사흘이 지나도록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회복을 의미하는 다섯 개로 영원한 회복을 의미하는 오천 명을 먹이셨고, 칠병이어에서는 완전을 의미하는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또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면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면, 일곱 개면 칠천 명을 먹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이 4,000명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남은 것도 12광주리 보다 작았으니. 하지만 이건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5"는 회복이다. 대희년이 50년마다 돌아오는 것도 그렇고 오순절이 그렇다. 반면에 "7"은 온전함이고, "4"는 늘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의 생각이 처리되는 기간으로 40일, 40년 이런 세월을 보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0일 금식 기도가 그렇고,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한 것이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종살이 한 것이 그렇다.


반면에 "3"은 늘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다. 삼위일체가 그렇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세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라는 의미라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7"은 안식이다. 안식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칠병이어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한 무리가 돌아가는 길에 길에서 기진할 것을 걱정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길이라는 것은 여정이다. 성경이 우리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고도 하는데 나그네가 곧 길 위를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흘 동안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가는 길에 지칠까 염려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염려하신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염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인생을 가는 여정에서 지치지 않기 위하여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천명이기도 하다. "4"는 사람이고, 그것이 영원을 나타내는 천명으로 표현된 것은 사람이란 그렇다는 것이다.


삼일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는 시간이라는 것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는 이 운명을 부족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이 육신 가진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까지 시간을 사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흘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 고치는 기적을 함께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길로 돌아간다는 것은 또 다시 각자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같이 그들 하나하나도 각자의 세계에서 다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나타내어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일곱 개의 떡, 곧 예수 그리스도로 안식할 수 있는 양식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사실 성경을 이렇게 숫자의 의미를 가지고 해석해 가는 것은 이해가 쉬운 것은 아니다. 먼저는 숫자에 대한 개념이 나라마다 다르기도 하고, 또한 이런 접근법은 대단히 알레고리칼하게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다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여정을 알거나 또한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말씀과 같이 숫자가 되었든 아니면 또 다른 것이든 그 여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렇게 이것이든 저것이든 천국의 비밀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천국 서기관의 비유이기도 하다.)


분명히 오병이어는 신앙의 전환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그렇게 회복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칠병이어는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4,000명)이라는 그 삶이 온전해지는 7개의 떡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7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그 삶이 온전해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 말씀의 진행 과정은 사람의 신앙 여정을 설명한다. 마태복음도 세례요한이 죽고 난 다음에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지고 예수님의 활동도 달라지며 예수님과 유대인의 갈등도 첨예화 된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신앙도 예수님이 나심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처음과 같이 자신 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자라가는 과정이 이 마태복음의 진행 여정과 비슷할 것이다. 적어도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그 정도는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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