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을 통 털어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 물론 특별히 믿음이 크다고 한 것이 예수님의 다른 칭찬과 아주 특별한 차별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자가 보는 관점에서 그것은 강조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나오는 이 가나안 여인과 종이 중풍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자 말씀만으로 치료해달라고 한 백부장(마 8장), 이 두 사람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 믿음을 더 칭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도 남 밑에 있기도 하고 또 자기 수하에도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면서 예수님께서도 말씀만 하시면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고,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분명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기록되었는데 그 두 모습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심판 날에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겠다.'고 할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구분이 어려운 것 같고,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나를 아시는 것이 될지가 궁금하고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정작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 간단한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신념과 헛갈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에 대하여 자신이 능동적이고 또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믿으려 애쓰고 또는 이루려고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신념과 자신의 의지일 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믿음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떤 것일까? 믿음은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믿음은 아주 순종적인 것이다. 이사 가는 날 아침에 그 집의 어린 아이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하거나 자신이 이 집의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같이 이사 가겠다며 부모에게 그 믿음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이사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자기 놀고 싶은 것을 하며 노는 아이의 마음이 정말로 그 부모를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정말로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사울에게 사무엘이 한 이야기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로 순종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 수양의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정말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제물로 또 제사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사의 형식을 받고 싶어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미가서와 같은 여러 선지서에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제사의 결국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에 제사의 완결인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체로 드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불살라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에 허용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이 육신의 살아있는 삶을 하나님께서 그 의지대로 사용하실 수 있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이 몸을 통하여 그 의를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바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종적인 마음인지 알 수 있다.


예전 유머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일어서서 가는 그 뒤통수에 하나님께서 "야! 나도 말 좀 하자."라고 하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하나님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마냥 하나님께 뭔가 해 드리려 하고, 또 뭔가 보이려 한다. 그나마 뭔가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것들뿐이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상관성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그대로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이다.(그러고 보면 눈치는 있는 셈일 수도 있다.)


믿음의 어원이  Pi'stis이다. 그리고 이는 충성을 의미하는 Pistos와 어원이 같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신다고 할 때 Pistos를 사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Pi'stis를 사용한다. 즉 이것은 누가 일방적으로 믿고 충성하는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인하여 생기는 마음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정하신 관계가 성립되면 자연스럽게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고, 하나님은 사람을 충성스럽게 여긴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은 언뜻 보면 예수님께 능동적으로 찾아 왔다는 것에서 수동적인 믿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에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생쥐가 자신이 물에 빠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생쥐가 순종해야 하는 가장 먼저는 생명으로서 가진 생존 본능,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어머니이자 대학부 지도교사였던 권사님께서 아주 기도를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가슴이 점점 커지면서 고통을 받는 병이 생겼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며 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시고 돌아가셨다. 그 상황의 모든 것이 잘못된 믿음이라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순종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 순종의 모습은 먼저 자신이 인생으로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운명에 순종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 자신들이 그려낸 메시야를 만나려고는 했지만 정작 인생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이시고 보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만나야 하는 운명에는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먼저 그것에 순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았다. 이는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숨은 아담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구원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 당시의 모든 종교적 가치관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만나기에는 부끄러운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즉 자신의 모습을 아담과 달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믿음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성경말씀과 반대로 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역사 이래로 늘 인간에게 불순종한다고 한탄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에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한 목적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과 또 이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그 목적에 너무 온전한 존재라는 것,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행하여야 그 부족함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목적이 그 삶 안에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소경이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런 논리로 사람을 이끄는 이들을 소경이 소경을 이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 가나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는 개와 같다고 자신을 여겼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예수님을 만나야 귀신 들린 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이. (귀신들렸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리해야 할 사람의 의식이 빼앗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딸이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모든 인생이 여자와 딸과 같은 존재이기에 딸이 귀신 들렸다는 것은 인생이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인생의 의식의 원래 주인인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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