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때로 어떤 것에 매몰되어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 경우에 대하여 많은 경우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다."고 하거나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진다."는 것과 같은 표현을 한다. 또한 단체 스포츠의 경우 개인적인 업적이 팀 성적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교훈을 주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매몰되어 버린 것을 늘 말씀하셨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으로서 그 마음 안에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면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 바로 율법으로 기록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조문으로 표현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즉 생명은 모르고 그 모양만 지키려 하다 보니 그 모든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 정체성의 본질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 분을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장로의 유전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 드릴 귀한 것을 드리지 않아도 좋다고 율법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도 육신의 부모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말씀을 몇 번 하셨는데 그것과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그러니까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이 하시면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말씀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부모이냐?"라고 반문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의, 곧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문이다. 즉 그것은 육신의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된 사람들 안에 임하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바로 진정한 부모, 곧 우리 인생의 정체성의 뿌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이 말씀은 크게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큰 의미로 보면 사람이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과 또 자신이 세상에 들어온 과정인 혈연 등으로 얽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흔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로 보기도 한다. 얼핏 이것은 좀 거리가 있는 논제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에게 그 부모는 육신에 관하여는 근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라는 종족 안에 속하여서 the human으로서의 정체성을 부모가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많은 이단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 심지어 교회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이라면 육신의 부모를 등지는 것과 같이 엄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를 외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찬양하기 까지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런 상황과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상황은 거의 같은 것이다. 즉 교회나 신앙은 지키려하나 하나님의 뜻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나무(신앙과 교회 생활)는 보지만 숲(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순된 관점을 가진 이들이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로 가늠하는 어리석음이 신앙이기 때문에, 손을 씻고 먹지 않으면 더러운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그 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즉 심령에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숨 쉬는 순간마다 다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첩이 아무리 의롭게 살고 지역사회에 공헌을 해도 간첩이라는 그것 하나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하면할수록 죄가 늘어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는 심령 안에 없는데 그가 율법을 지켜 행하면 행할수록 죄는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이유와 이 세상에 처한 자신의 모습이과 환경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체 교회에 가고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렸으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그들은 손을 씻어서 깨끗한 것을 입으로 먹을지는 모르지만 안에는 더러운 것이 있을 뿐이고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도, 또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삶의 환경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모습은 지금도 많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육신의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무시하고, 또한 교회 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짐승 같다고 까지 하면서 무시하는 모습은 감춰진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의 가치관에 깔려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종 된 모습으로 섬기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적선하듯 나눠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그 행위 자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이유,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더 문제다.


사람 육신을 가진 것은 이 육신이라는 형식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형식이 속한 세상과 사회 역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곳이고, 관중이고, 또 그림을 그려낼 도화지나 배경과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은 분명히 죄악 되고 하나님 보실 때 벌레 같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벌레로 규정하는 것이나 죄인임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품성과 생명과 이미지(형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 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잘못 생각한다. 먼저는 인간이라는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다. 즉 인생이라는 것이 이대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므로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처음이고 개인적인 문제라면, 이 인생이 속한 세상이 죄악이 만연해서 그 안에서 나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할 장소가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과 엮이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육신을 주시고 또 그 육신을 세상에 속하게 하신 이유를 안다면 세상의 일부이고 또한 자신이 육신이라서 연결된 부모와 사회적 현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정하고 부인하며 항쟁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몰라서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 시비를 건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때 유대인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그런 것을 보면 성경말씀은 특정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고 놀랍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이 단순히 육신의 부모에게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라는 문제로 본 것이다. 마치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이 허락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엮인 부모님과 또한 세상의 여러 가지 법과 질서도 다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육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심령은 그 안에서 내는 것이 다 부정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조문의 모양을 지켜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의미고,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부모를 주신 뜻이 이 육신을 세상에 속하게 하신 이유를 알면 부모도 공경하고 하나님도 공경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심이다. 그러니까 속, 곧 사람의 속에 그런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으면 율법을 행위의 모양으로 지키는 것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에서 비롯된 그의 삶이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세상의 법과 또 세상의 부모와 모든 사회적 상황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도화지와 같은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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