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13-21 오병이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0. 19:27 Writer : 김홍덕

'4복음서에 모두 다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성경퀴즈대회에 참석해 봤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문제일지 모른다. 그 답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고도 12 광주리에 남은 예수님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기록한 모든 저자들이 이것을 공통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전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눈에 이것은 정말로 사람들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 공감하는 것이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으로만 본다면 13장까지 세례 요한이 살아 있었다. 물론 그가 막바지에는 감옥에 있었고 신앙적인 활동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4장 1-12절에 세례 요한이 죽는 일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을 둘로 나눈다면 13장까지와 14장부터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 있어서도 마음 안에 세례 요한의 신앙이 남아 있던 시절과 그것이 죽고 없어진 삶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배를 타고 가셔서 빈들에 계시니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다. 빈 들은 원래 세례 요한이 있던 처소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었는데 죽고 나니 빈 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던 신앙으로 살다가 세례 요한의 신앙을 떠나고 나면 그 마음이 빈들과 같이 비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 곧 세례 요한의 신앙이 있던 사람들의 빈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새롭게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빈들로 가셨다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빈들로 모여들었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는 것이 알레고리칼 할 수 있지만 자기 마음에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은 이 말씀이 그것이라는 것을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말씀이다.


즉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다가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신앙을 떠나게 된다. 그건 필연적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행위로 도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이것이 로마서 3장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세례 요한이 죽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모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모든 증상들, 귀신 들린 것과 같이 머리의 의가 빼앗겨서 신음하는 사람, 중풍병자처럼 하나님의 의를 알지만 그것이 삶이 되지 않는 사람, 또 문둥병과 같이 하나님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고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숫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서 "5"는 늘 회복에 관한 숫자이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돌아오고 그 다음에 오는 50년째 희년에는 모든 종들도 해방되고 또 빚도 다 탕감되며 팔았던 땅도 다 원래 주인의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규례이다. 그래서 5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신앙 곧 율법적인 신앙을 떠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양식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숫자 1,000은 유대인들에게 영원성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천년 왕국이다. 영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양식을 먹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회복, 곧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했다. 성경에서 5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2는 항상 보증에 관한 것이다. 즉 너나 나나 같다는 것이고, 너와 내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문둥병이 나음을 받을 때 비둘기 두 마리를 잡아서 하나는 드리고 하나는 놓아 주는 것이다. 놓아주는 것과 드려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도 하고, 하나가 놓아졌기에 하나가 드려지고, 하나가 드려졌기에 놓아주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떠나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심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와서 먹는 것을 논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고을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면 좋겠다고 예수님께 건의를 했는데, 그것은 날이 저물었고 또 빈들이라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과 전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과 같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수가성 우물가에서도 같은 이유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사람들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축사한다는 것은 그것과 축사하는 사람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번제물의 머리에 축사하듯 손을 대는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성찬식 때 축사하시고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또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 이 빈들에 모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은 예수님이지 고을에 가서 사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오병이어는 세례 요한의 신앙에서 떠난 사람,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에게 성찬식과 같이 축사하심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먹이신 것이고, 그 음식이 바로 회복과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의 양식으로 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자신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어가 알래스카로 가서 죽는 것은 바다의 미네랄을 땅으로 옮기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즉 바다의 미네랄이 땅에 사는 짐승들의 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사람이 먹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병이어는 세례 요한의 신앙에서 떠난 사람들에게는 고을에 가서 먹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보이신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사람들이 양식으로 먹고 나면 오히려 그 양식이 12광주리에 남는다는 것이다.


12는 왕국과 나라를 상징한다. 열두 진주문, 열두 사도, 열두 지파가 다 그렇다. 즉 세례 요한의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양식으로 삼아서 회복되고 보증하게 되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모였을 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만이 교회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사건은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나 적은 것을 기적적으로 널려서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하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여정에서 세례 요한의 때를 지나서 날이 저물 듯 신앙의 안목이 어두워지고 또 주리듯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이 먹을 것, 곧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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