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노라면 필수적으로 누가 천국의 선택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반대로 누가 심판을 받아 들어가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불확실성과 맞물려서 다양한 형태를 낳는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이런 불확실성이 믿음을 낳고, 어떤 이는 포기하는 방종의 모습을 보이고, 더 나쁘기는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종교성을 띈 집단이나 사람들도 있다. 종말론이 바로 그런 부류이다.


천국에 누가 들어갈 것인지는 사실 분명하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여기는 것을 또한 자신도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들어가고 속한 나라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의로 삼고 있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속한 나라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반대인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악함과 다른 것을 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쟁점은 오직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논제이다.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모른다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물이 내세나 다음을 위하여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이 천국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것을 의롭게 또한 옳다 혹은 악하다고 하는지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관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사람의 모습과 행동과 삶에 대하여 무엇을 선하게 여기고 무엇을 악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을 보고 선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과 기준이 하나님과 같은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 그런 의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어야 죽어서 하나님의 의로움 안으로 들어가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린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히 그 어부에게는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합당하면 천국에 그렇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국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것을 언급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교회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천국은 사람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를 가지고 계신 나라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에 뜻에 대하여 사람과 하나님이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아담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에 반해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신 차이에서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행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또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크게 짓고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과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보이시고자 하신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시고,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기를 바라시는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이고, 또한 천국에 가는 기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 기준에서 아무리 주여! 주여! 해 봐도 결국 하나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부족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계속 갈고 닦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훌륭하게 할수록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그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가 물을 때에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가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치명적이 문제가 있다. 사람의 원래 모습을 부인하고 그것에서 멀리 갈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모습, 곧 사람 본래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고, 또 사람을 단련시킬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이 흙(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을 단단하게 해서 하늘에 이르려고 한 생각과 같은 것이며,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땅에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담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가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겨져서 달리셨고, 바벨탑은 쌓은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 박히셔서 사람의 행위로 하늘에 오르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시면서 그 부끄럽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모습, 곧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아 죄가 아닌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두 가지 사람에 대한 생각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시는 생각과 같은 선택일 때 그 사람이 바로 진주장수가 바꾼 진주이고, 밭에 감춰진 보화이며, 그 생각이 바로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그물에서 그릇에 담기는 고기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