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사는 동안 의롭게 살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뭐 이런 저력 형용사절을 붙일 수 있겠지만 결론은 거의 그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가진 천국의 개념과, 천국과 연관된 신앙의 목적이 보통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 신앙이라는 것의 골격의 메커니즘은 <생명>이다. 즉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생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양과 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본질, 요즘 말로 DNA가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이 다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은 본성이 안에 있어서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고, 가공된 것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만들어 들어간다. 물론 안에서 밖으로 만드는 것도 있지만, 안에서 없던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단순한 구조로 정리를 한다면 아마 <내용과 형식>이라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존재냐? 소유냐?>에 대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유전자라는 내용이 생명의 육체와 본성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이고, 가공된 것은 형식을 만들어서 내용의 의미를 대체하거나 의미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알고 보면 성경은 정말로 모든 것을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을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하면 <본질과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본질이고 본체이시나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 존재를, 능력과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두고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을 설명하는데 세상의 것이 진화하고 발전해서 또 다른 세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셨고, 아버지의 의지라는 본질 없이 아들을 낳은 롯의 두 딸의 아들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라는 것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과 세상을 이렇게 볼 수 있느냐 아니냐는 신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어쩌면 이 관점 하나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일 수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LOGOS인데 이 로고스는 계획되고 계산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Lego 장난감도 같은 어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아담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 형상이 바로 image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연상되고 생각나게 하는 그 이미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법을 알면 왜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인지, 왜 예수님께서 아담에 비유되었는지, 또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지, 또한 왜 외식하는 것이 옳지 못한지와 무엇이 외식인지, 또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약속(의와 본질)을 받은 믿음과 증거(표현된 형식)를 받은 믿음이 무엇인지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하고도 중요한 안목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천국은 분명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본질이 있고 그 표현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본질이 자동차가 되었고, 시간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시계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다 내용이 있고, 그 본질과 목적이라는 내용이 표현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있고, 음양이 있고, 밤과 낮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라는 형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본질도 있는 것이다. 아니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이 이 법에 의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 법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부끄러워하거나 더 단련해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의라는 인생의 본질이 표현되는 온전한 표현 양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마태복음 13장 44절 한 절에 나오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그것이다. 천국이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밭이다. 그리고 밭에 감추인 보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러니까 밭에 보화가 감춰져 있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라는 보화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밭과 같은 사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을 밭을 사들 하나님께서 자기의 세계 안으로 들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비유의 말씀이다.


천국은 죽어야만 가는 나라가 아니다. 사실 죽어서 천국에 가려면 살 동안 이미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프로야구 선수로 훈련하고 등록된 일이 없는 사람이 꿈의 무대인 1군에서 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 동안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밭과 같이 흙으로 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라는 보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물이 있으면 밭을 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인생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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