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24-30 가라지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30. 12:04 Writer : 김홍덕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고 하셨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이에게는 말씀 자체가 본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에 송사거리로 삼기도 한 것을 보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몸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차별하기 위해서나, 바리새인들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두고 마태가 그 모든 것이 비유라고 한 것은, 비유라는 것이 어떤 본질을 두고서 이야기 하는 것이듯,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아는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모르면 바리새인처럼 자신들을 희롱하는 것으로 알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송사할 단초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과 행동은 말씀이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과 행동은 다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든 비유를 알 수 있는 비밀의 열쇠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하셔도 어떤 이는 그것의 본 의미가 열리고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읽고 공산주의를 만들고, 어떤 이는 성경을 읽고 교회를 만들어서 기업처럼 운영하고, 어떤 이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서 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어떤 이는 이 세상에서 복 받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인 규례를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고, 어떤 이는 죽고 난 다음 생에서 잘 살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로 읽는다. 그러니까 같은 성경을 읽고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다 자기 안에 어떤 기준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본질로 보인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것이라고 줄곧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가 비유처럼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안목을 가진 이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비유가 열리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위하여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천국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 달리 천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바로 천국이다.


천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다.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나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한 나라가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즉 그 나라의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의를 좇아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하여 제자들은 알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모르는 이야기가 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일한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 곧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삶을 사는 사람을 주관하는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가라지 비유에서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말씀 하실 때, <천국은 마치>라고 하신다. 물론 다른 비유들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지금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좋은 밭이 아니라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과 같은 곳에 떨어진 씨는 동일하게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보지 못하는 다양한 심령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라지 비유는 어떤 심령이 좋은 밭인지, 또 좋은 밭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라지 비유와 같은 일이 없는 심령이라면 그것은 천국과 같지 않다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좋은 밭에 씨를 뿌렸더니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좋은 밭이라면 가라지가 되었든 잡초가 되었든 열매를 맺는 것을 헤치는 다른 것은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그렇지 않고 좋은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 밭은 사람의 심령이다. 사람의 마음에 원수가 심은 가라지는 창세기의 뱀이 심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렵게 들리겠지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것도 같은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누가 자신이 처한 곤고함과 사망에서 건지겠는가? 탄식하다가 8장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감사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즉 가라지를 뽑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정말로 천국의 비밀이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것을 늘 뽑아 버리려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신앙 없는 사람을 늘 축출하려 하고 비난한다. 또한 어떤 조직이나 단체라도 다 징계에 대한 규례가 있다. 그러니까 악한 것을, 가라지를 늘 뽑아 버리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좋은 밭이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것을 뽑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는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그런 연약함을 그냥 두시는데 종의 신앙이 그것을 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가라지 비유는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밭으로 표현되는 사람의 심령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추함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뽑아 버릴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죄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탄식했지만 "그러므로" 즉 그 죄의 몸을 인하여 그리스도께 감사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정말 너무 너무 중요한 천국의 비밀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이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비밀은 그것을 푸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천국의 열쇠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삶이 비유라는 것을 아는 안목이 바로 그 열쇠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비유라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진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 비밀의 열쇠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에 관한 말씀이다. 즉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말씀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도 결국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좋은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마치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즉 선과 악을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과 악하게 여기시는 것이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기준을 가질 때 선하게도 보이고 악하게도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다. 즉 인생의 모습 안에는 사람이 볼 때는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려 하니 이 육신은 늘 부족하다. 금식기도 해야 하는데 먹지 않으면 안 되고, 좀 경건하고 싶은데 여자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는 이 육신이 가진 본성은 도무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뽑아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옛날 수도사들이 그런 생각이 나는 육신을 스스로 채찍으로 때리고 한 것이다. 그런 신앙의 모습들이 다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하지 않겠느냐 생각한 종의 신앙인 것이다.


원수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비유는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을 보는 안목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라지다. 그래서 아담은 이 육신을 부끄러워했지만 예수님은 그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의 모든 정체를 십자가에서 보이심으로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셨고, 바울 사도는 그 죄의 몸이 있어 그리스도께 감사한다고 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알곡에 치명적인 장애를 주는 가라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밭은 사람을 의미하고 그 밭에 심긴 씨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씨로 인한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밀 심은 밭에 밀이 열리면 밀밭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을 심은 심령에 그 말씀이 생명이 되면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밭에는 가라지가 있다. 즉 원수가 심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원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준 존재다. 그 생각이 들어가서 사람은 이 육신을 부끄러워하고, 이 육신을 괴롭히면서까지 절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육신의 연약함은 버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때가 되면 알곡은 곡간에 가라지는 또한 다 태워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추수한다는 것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모든 연약함은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 원수가 심은 모든 생각은 밀밭에 심긴 밀이 추수함과 같이 사람이 육신을 가진 존재의 목적이 달성이 될 때에 그 모든 원수의 생각이 다 불사르듯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히나 이 가라지 비유는 교회에 많은 교훈을 준다. 사람들은 신앙에 방해가 되는 생각이나, 또한 신앙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건 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다. 그것은 종의 신앙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교회와 또 소위 말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것을 모른다. 가라지를 보면 다 뽑으려 한다.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다 지적질하고, 비난하고 책망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 종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진정한 신앙, 정말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사람 안에 있는 각양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는다. 그것을 탓한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그것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한 아담과 생각이 같은 것이다. 아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에 감추려 했고, 사람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보고 뽑아 버리려는 사람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함, 또한 신앙적인 관점에서 잘못하고 죄 지은 것을 뽑아내려 하는 것은 다 선악과를 먹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생각이다.


주인, 곧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열매가 되어 추수할 때가 되면 다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임을 아시는 분이시다. 가라지를 뽑으면 오히려 알곡이 다친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도 있다. 그러니까 이 가라지, 원수가 주고 간 사람의 연약함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감사할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원수가 준 가라지와 같은 생각의 대상이 되는 이 육신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비밀 중의 비밀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연약함을 버릴 것으로 보는 생각이 있는 사람은 종과 같은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육신으로 인하여 늘 곤고하다. 그리고 이 육인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은 다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가진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생각이 바로 원수인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 그것을 뽑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종의 신앙이다.


천국의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연약함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 연약한 육신 가운데 두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육신이 정말로 사망 같은데, 이 사망의 몸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사망의 몸에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이다. 바로 사람이 가진 육신을 가진 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러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모든 비유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로 자신을 속하게 하는 천국의 비밀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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