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하시고는 제자들을 보고서 "나의 모친과 동생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실 알고 보면 무리한 말씀이 아닌데, 어떻게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앙적 마찰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하여 무리한 말씀이 되기도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두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가끔은 예수님이 이상한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는 외식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깝다. 신문에 날 정도의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의 이웃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은 의외로 많다. 교회 다닌다고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딸과 가족이 가진 갈등,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일요일에 회사를 무조건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런 모든 행동들은 다 십자가를 팽개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하는 것을 보고서 교회에 다니는 일로 가족에게 또한 옆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고서 나타나는 반응을 핍박이라 여기고, 그런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두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다고 설교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가치관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삶을 마음대로 주관하는 것에 끌려갈 때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런 요구가 핍박이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먼저 능동적으로 문제의 주인공이 되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반응을 핍박이라 여기면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즉 어떤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으킨 문제는 신앙적 가치가 거의 없다. 그건 그냥 벌이고 반응이며, 이미 값을 다 치른 것일 뿐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한번쯤은 이미 자신이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 살았다는 것이기에 그 값을 다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신앙은 수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고, 믿음도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을 때 믿음이지 의지를 가진 능동적인 믿음은 신념일 수는 있어도 믿음은 아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찾아 온 모친과 동생들의 목적은 <예수님께 말을 하려고> 왔다고 했다. 말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능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혈육으로 어떤 관계이든 간에 주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예수님과 형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으로 나서겠다면 모친도 형제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물학적인 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찬을 생각해보면 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피는 그 생명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기에 피가 같다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요즘 말로 하면 DNA가 같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생명이 같고, 본성이 같고, 생명의 정체성이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를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들어라 이스라엘>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그 정체성이 같은 사람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피를 가진 혈육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혈육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외면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셨는데, 그것은 '여자인 당신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들을 낳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신 뜻이 들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여자로서 마리아의 삶의 목적이 온전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이야기가 잠깐 다른 데로 갈 수 있지만 그래도 연관이 있어 언급한다면, 신앙의 가치관이 다른 가족과의 관계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이기 때문에 잘 물리지 않고 더 첨예하게 맞서기도 한다. 신앙은 영적인 문제고 삶의 본질과 사후세계까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인간 그 너머 신의 영역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에 대한 다툼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그 뜻을 잘 굽히지 않고, 그런 이유가 가족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각의 전환, 아니 예수님을 통하여 정확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과의 마찰에 있어 그것을 제압하거나, 그들의 핍박을 하나님께 고자질 하듯 하여 그들을 벌주거나 생채기를 내는 법으로 이기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 온전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고 계시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어떤 존재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이들의 손에 끌려가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신앙인들이 신앙적인 마찰에 있어 보여주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아니 아주 반대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하나님을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문제와 갈등에 있어 이기는 자가 되려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것은 능력이 있음에도 참고, 마음을 억눌러서 견뎌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군사를 이기거나 십자가에서 기적적으로 내려오시지 않은 것은 그런 능력을 참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가진 본성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다르게 신앙적인 갈등에 대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본성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갈등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한이 있어도 싸워 이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못 박아서 이긴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이기시는 그런 법인 것이다. 즉, 사람이 신앙적 갈등에 있어 정말로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같은 혈통과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 본성으로 인하여 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는 그 생명이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히 살아있는 생명이기에 죽음에서 또한 패배에서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과 믿음은 그렇게 정말로 수동적인 세계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이라는 것도 그렇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혈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도 그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설사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또 신앙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주장하듯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자 하는 이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들으려 하지 않는데 말을 하면 그것은 시비일 뿐이다. 아니 시비 이상으로 그것은 자신이 가진 의를 주장하고 그것으로 인정받고 의로워 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 27:14)


신앙과 믿음은 정말로 듣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진 혈육이 누구인가 할 때, 그것은 듣는 이요, 순종하는 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요 모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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