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씀하시는 악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과는 좀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것을 악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일반적인 견해에서 보듯 살인과 절도와 같은 것이 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악함의 뿌리가 있으니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하신 것은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때 그것을 들은 서기관들이 하나님 외에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이 참담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사람들 사회에 있는 많은 죄악들의 원인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물론 직설적으로 그렇게 표현된 곳은 찾기 어렵다.)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삶의 모습을 보고 악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개선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그것이 장성하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가 모든 죄의 근원인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나름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에는 숨도 쉬지 않듯 가만히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 아니 누구라도 사람의 죄를 사하거나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다.


악한 세대라는 것은 바로 그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대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일을 판단하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님계시든 0 혹은 1세기나 지금의 21세기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불가하고, 사람이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를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대는 다 악한 세대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육신의 기능도 동물들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많고, 또 자연 앞에서 무력한 모습이기도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지도 못할 때가 많은 그런 연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런 연약함으로 인하여 사람은 그것을 감추고 자신은 남과 달리 그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추한 일들을 꾸미고 행하는 그런 부정한 존재이다.


그렇다보니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이 가진 갖은 연약함을 감추고 숨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우선 옷을 입고, 또한 화장을 한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은 감추고, 공부한 것, 사회적으로 자신이 이룩한 것,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내 민다. 그러니까 자신은 연약함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든 행동의 조상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다. 아담이 선과 악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이 생기고 나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벗은 모습을 감추어야 할 것이라고 하신 적이 없음에도 그것을 감추어야 했던 단 하나의 변화는 선악과를 먹은 것, 그것이었다. 즉 선과 악에 대한 기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 기준으로 보니 자신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바로 그 아담의 생각과,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서기관의 생각과, 귀신 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함과 같이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빼앗겨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를 고치는 것을 오히려 귀신의 힘으로 고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생각과, 오늘날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래도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본이 된다는 각양의 기준을 제시하는 생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이 옳다고 인정받는 세대, 그 세대가 바로 악한 세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대는 늘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능력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거나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고상해지려하고 더 똑똑해지려 한다.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욕구로 가득한 세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수 있는 기적인 것이다.


지금도 이 시대에는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영웅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어벤저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바라는 표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물론 영화는 오락 그 자체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하늘을 날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히어로가 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그렇지 못한 이 육신을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구체화 한 것이 바로 무화과 나뭇잎이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이다.(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무이므로) 율법은 사람의 행동에 대한 규례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감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연약함을 감추는 것은 그 연약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잘 관리하면 인간의 연약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은 다른 게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표적은 오직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주 오만한 기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분명한 한계 안에 두신 것은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분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의 범주 밖의 일을 일으키면 신앙이 좋다고 하거나, 그러면 믿겠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사람의 범주 밖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사람의 능력 밖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 주권 중에 사람으로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고, 그 외의 영역은 또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같은 위대함은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바위를 쪼개는 판에 사람이 견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대의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사람들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또한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면 다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고 살면 세상에 있는 사회적 요구를 십자가 지듯 할 것이고, 종교적인 규례는 범하려 해도 율법이 완성되듯,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듯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요나는 그다지 착한 선지자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 곧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살다가 요나가 바다에 빠지듯 세상에 삼켜져 있다가 돌이킴으로 삼일 만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모든 인생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바다 곧 세상의 법에 삼켜져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 먹히듯 죄인이 되는 자신을 알고 원래 사람의 자리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표적 중의 표적이고,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