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귀신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내용은 귀신이 사람에게 나갔다가 물 없는 곳을 찾지 못해서 다시 돌아와서 보니 원래 있던 사람의 속이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어 자신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세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재밌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은 귀신이 사람에게 나가서 찾은 것이 물이 없는 메마른 땅을 찾았다는 것이다. 어떤 생물이라도 나그네와 같이 되었고 방황할 때에 가장 먼저 찾아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인데, 역시 신분이 귀신이라 그런지 물이 없는 곳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의문은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늘 자신을 채우려 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의 이유와 의미다. 그러니까 삶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잊거나 일부러 잊으려 하면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그것을 채우려 한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이 돈이나 명예에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추구 욕구와 물은 관련이 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그 갈증에 대하여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이 가진 그 갈증을 해갈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통하여 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사람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것이다. 다만 물은 상수와 하수도와 같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먹어야 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먹지 못할 것이 있다. 바다는 물이 넘쳐나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래서 바다는 늘 세상을 의미한다. 물이라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가진 정체성의 갈증을 채울 수 있어 보이지만, 세상의 돈과 명예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이 해갈되는 것은커녕 더 목마르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것이다. 또 바다는 세상의 모든 하수들이 함께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넘쳐나는 세상에 비유된다.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귀신은 그것이 없는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세대 또한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가 찾는 표적을 보여주어서 금방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물을 멀리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꺼리는 귀신같은 마음이 그 안에 가득찰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귀신은 devil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신은 unclean sprit이라고 킹제임스 버전에 나온다. 깨끗하다는 것은 상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깨끗한 행주라고 하는 것이 사용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주로서의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신 들린 자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정신을 주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정신을 빼앗기듯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사람과 하나님을 정의 내리는 세대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연약한 육신을 만드시고 그 상태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은 존재라고 여겼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이 육신의 연약함이 아니라 표적을 일으키듯 육신의 연약함은 감추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다.


바로 그런 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심령, 곧 귀신 들린 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식하는 것과 귀신 들린 것과 깨끗하지 못한 것과, 사람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며 그것을 구하는 악한 세대나 다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날로 본다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연약함을 잘 다스리고 감출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시는 생각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나, 귀신이 물 없는 곳을 찾는 것은 같은 본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물은 사람에게 육신을 가진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해갈하는 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귀신은 그런 물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물은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과는 반대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이 귀신 들렸던 사람과 같이 점점 더 심해질 뿐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아서 더 갈하여지고 더 목말라서 마시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더 악화되듯 한다는 것을 일곱 귀신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악한 세대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것을 두고 성령의 일로 보지 않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일로 보았던 가치관을 가진 세대가 아닌가? 그 세대가 바라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몸을 가렸던 아담과 같이 감추고 그것을 이기고 극복한 표적을 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세대인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성령을 훼방하는 세대이고, 그런 세대는 우선 기적을 본다 해도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이 더 그런 것만 요구할 뿐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것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역사로 인한 성령의 감동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