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성령 훼방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바알세불이라며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이어져 있다는 것은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에 이어서 성령의 훼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앞에서 포스팅한 바와 같이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법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씀을 하시고, 또 이어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 말로 인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는 것은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고치시는 예수님과 그 치유를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폄하하는 바리새인, 그리고 그 말에 대하여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말이 심판 날에 심문의 대상이 된다는 이 모든 것은 다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신앙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결국은 그 사람의 말로서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는 생명과 같아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말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낭중지추라는 말과 같이 속에 있는 것은 언제라도 다 표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고, 또 표현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외식이라는 것은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말씀은 그 안에 없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외식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가 좋은 과실을 맺는다고 하시는 것은 생명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안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행동만 좋은 열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성령이 고치시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율법이 왜 있는지는 알지 못하면서 행동만 지키려고 하는 것임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외식하는 행위, 곧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낸다고 하시면서 사람의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욕하면 지옥 간다.'는 식의 해석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그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선하면 선한 말을 했을 것이고, 악하면 악한 말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심문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이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인 기준으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한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상황, 모든 일에 온전하게 선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선과 악을 사람들의 행동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는 형식일 뿐 선과 악의 본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보고 악하다고 하신 일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심에 유대인들이 '사람이 어떻게 죄를 사하는가?'하며 참담하다고 했을 때이다.(마, 9장) 이것은 지금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를 고치신 것을 두고 성령이 아니라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랬다고 하는 이들도 같은 마음이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정하여져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백성을 회복시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교회가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방식을 보면 그렇다. 형식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 어떤 신분과 재물이 어느 정도인지가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것이 없으면 목사도 장로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제대로 하려면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신앙 고백을 보고 청빙해야 할 것이다.) 그런 지금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자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돈 없으면 장로 되기 힘들다는 것은 그런 것이 없으면 교회에서 신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인생의 상태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보고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며 참담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안에 선한 것이 없고, 그야말로 그 마음에 악한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세상적인 소양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악한 것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그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를 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 안에 악함으로 인하여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요, 선한 것이 없는데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심판 날이 되면 그런 모든 것이 다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는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훼방했으니 사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보면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보지 않는다. 허나 바로 그런 생각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시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상실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자꾸 비판하는 것 같지만,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선출할 때 사회적으로 좋은 지위에 있거나 부유할 때 유리하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재물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 훼방이다. 성령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육신을 가진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자를 고치심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다고 하는 것과, 서기관들이 중풍병자에게 죄가 사하여졌다고 고치시는 예수님을 참담하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런 생각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 자체로는 안 되고, 종교적 거룩함이 있든지, 요즘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좀 인정받든지 해야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육신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보는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육신 그것만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하기에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그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말로서 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듯,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예수님을 보는지를 그 사람의 말로서 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재판하듯이 심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지적을 하는 것이 심판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한다는 증거다. 하지만 예수님의 심판은 그렇게 '너 이랬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내어놓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 육신에 아무 것도 더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가치관, 그것이 자신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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