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이 귀신들려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는 초인적인 일을 보고서 그것은 귀신이라는 초인적인 존재가 개입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귀신 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것,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현상을 보고서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외면하는 외식 가운데서 그것을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성령의 역사로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답을 하시고,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일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사건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령의 훼방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내셔서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는 것이 바로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회복되는 일인데, 그것을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보고 들을 때 회복이 되도록 성령이 역사하실 여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못하는 것은 귀신 들린 것과 같다. 머리가 주인이 없이 세상에 빼앗긴 것이나, 사람이 자기 생각이 아니라 귀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귀신 들린 자와 같이 세상의 것에 정신이 빼앗겨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것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라고 하는데서야 어떻게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으로 주신 것이다. 그 방법은 여러 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이 그거 하나였기 때문이다.


성령의 훼방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육신을 가진 인생, 더하거나 가공하거나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위대해지지 않은 연약한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보기 좋다는 것을 알아서 그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하듯이 이 연약한 육신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이 인생에 세상의 성공을 더하고, 교회에 더 드릴 수 있는 재물이 있으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방언하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처럼 인생의 한계를 부인하고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성령의 훼방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안에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우리의 이 육신 그대로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 육신의 삶을 갈고 닦아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래 사람이 적어도 저 정도는 되어야 따라하고 싶지!'라는 자리에 이르러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없을 것 같지만,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과,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장로가 되는 것과,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좋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이 다 그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과 반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적어도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는 기준을 가진 자들 앞에서 그 기준에 미달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신데, 그것과 반대로 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목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목사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람의 삶을 굳이 훼방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를 훼방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목사가 교회에 집행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성령 훼방은 아니다. 정말로 웃기는 것은 다툼이 있는 교회마다 하나같이 다투는 상대가 성령을 훼방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 훼방을 논하기 전에 성령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한 것은 초라한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성령이 하신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오늘날도 '그래도 사람이 적어도 이건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 같이 세상의 임금들이 요구하는 것이고, 흙을 굽듯이 사람이 가진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생각과 가치관과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 안에서는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서 죄인이 되고 실패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게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