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이후에 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되면 바알세불이 스스로 분쟁하는 것과 같으니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간과할만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귀신 들른 자를 고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보고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고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상황이 바리새인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그런다고 주관적으로 보듯이 이 일이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8)

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을 볼 때 예수님과 같이 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고, 그렇지 않고 예수님과 그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바알세불의 힘으로 그런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래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공간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함께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고방식은 진정한 이단적 사고방식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행간을 읽듯, 그 의미를 알려고 해야 하는데 이런 말씀을 두고서 공간적으로 또 같은 조직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외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공간적으로 조직적으로 또 어떤 조건이 달라도 같은 의에서 나오는 가치관과 안목과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인종이나 삶의 질이나 혈통이 아무리 달라도 다 같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것으로 보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는 의에 의하여 세워진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또 그런 대 집합에서 파생된 세부적인 의에 기초를 두고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간다고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모양이 어떠해도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성령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다. 그렇지만 항상 모호하다. 일단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하지만 성령은 에너지고 감동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여기고, 또한 자신도 그런 삶이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구조의 법은, 영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의는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고 또한 질그릇이며, 하나님의 말씀 곧 의가 심기는 땅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처음 온전히 표현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에게 온전히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예수님을 통하여 제대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았고 또 살고 살게 될 모든 사람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곧 하나님의 의가 그 삶으로 표현되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표현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볼 때, '저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구나!' 깨닫게 되고, 또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거면 그냥 하늘에서 말씀만으로 다 하시면 되지 굳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깨달음, 그 감동 그것이 있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자신이 삶이 되는 것을 알게 하는 능력을 보이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하심이다.


그런 성령의 능력은 사람이 죄를 사함 받는 유일한 길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이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보고, 또한 예수님의 삶을 보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인 자신에게 주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구원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삶을 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보고서 자신도 그렇게 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데, 이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데 어떻게 죄 사함이 있을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성령이 감동하시면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심겨져서 이제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일을 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을 보고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할 방법은 없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방법을 방해하는데서야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나 심지어 목사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공간적으로 조직적으로 함께 하는 것과 교회가 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하는 것들은 성령도 하나님의 의도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생각과 말이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 유일한 방법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육신을 가진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 그것뿐이기에 그것을 방해하면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고, 피라미드가 있는 애굽과 같고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여주신 것을 보고도 성령의 감동 곧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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