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힘들어 한다. 주일이면 하루 종일 교회에서 수고하고 돌아오는 것도 힘들고, 때로는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을 때 감사절이라도 돌아오면 헌금 부담에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긴 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힘들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또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면서 가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특히 강단 위에서 그런 말을 많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다. 힘들지만 따라 오려 하면 내가 힘을 주겠다거나, 아니면 그렇게 힘든 것을 견뎌내야 천국에서 상급이 크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가벼운 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차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 자체의 무게도 무게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사형수라는 짐을 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가벼운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가벼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진다고 해석하고 그렇게 전하고 또 믿기도 한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다른 의미이다. 만약에 그것이 경제적으로 편리해지고 이 세상에서 사는 육신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육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한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아닌 자신만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일 뿐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잘 생각해보면 참 쉬운 것일 수 있다. 망치는 망치로 사는 것이 가장 쉽다. 망치로 고기를 썰려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와 같이 사람도 사람이 지어진 목적대로 그 본연의 창조된 목적대로 살면 그것은 쉬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또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히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따라하고 어렵고 어렵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람이 보고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위하여 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전하고자 하신 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자신이 십자를 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대신지지 않아도 십자가를 지신 목적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바라시는 바이다.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은혜고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이것에 대하여는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해 온 것이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우리 삶의 많은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신 이유를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이유는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제사장도 아니고 귀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율법도 범하고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어울리던 주제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엄연히 유대 땅을 다스리는 로마의 권력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율법을 몸으로 다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절기를 지키며 길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여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인 사람들과 실컷 어울리면서 그런 것을 지키려는 자신들을 비난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은 이때까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끌려가는 죄인이 되어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로마의 총독 앞에서 선언하심으로 죄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면 스스로 그렇게 죄인이 되신 것은, 먼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바리새인과 같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려하는 기준으로 보면 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주일 성수만 몸으로 지켜내려 해도 평생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즉 언젠가는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교리 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다.


또한 로마의 총독 앞에서 죄인이 되신 것은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기준에서 적어도 한번은 패자가 된다. 그 뿐 아니라 죄와 빚이 같은 의미라고 볼 때, 그 이유가 집을 사는 것이든 병든 부모님 때문이든 한번쯤은 빚진 사람이 되기 마련인데, 그렇게 죄인이 된다. 나면서부터 부자인 사람도 어떤 세계에서는 한번은 다 패자가 된다. 그것이 연애든, 부자 순위든, 아니면 세상의 명예나 권력 앞에서든 그 어떤 세상의 기준에도 예외 없이 승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또한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다 그렇게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즉 십자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죄인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때까지 그렇게 밥 먹듯 행하시던 기적은 오간데 없고 무력하게 그냥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이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율법이나 교리를 범하는 죄인이 되고, 또 세상에서 패자나 빚진 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발가벗겨진 것은 옷과 같이 세상에서 얻어서 우리의 모습을 감추어주던 신분이나 지위도 우리를 죄인 되시듯 우리가 죄인 될 때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리 앞에서 우리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세상의 왕이 될 수 없다고 할 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선의 기준을 주장할 때에 그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심문하던 유대인들처럼 작은 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 주장 앞에서 주장하는 이의 뜻대로 하는 것은 힘들다. 때로는 그렇게 하면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큰일을 수습하느라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바로 그런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에 맞서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반문하고 주장하고 심지어 가르치려 하면 그것이 바로 다툼이 된다. 그러나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로 다툴 이유가 없다. 도로에서 앞질러 가는 차를 보면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 대한 쓸데없는 가치 부여다. 내가 그 사람보다 늦게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보통의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굳이 앞질러 가는 사람은 살다보면 어떨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아닌데 그냥 자신이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도로에 자신의 의를 펼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인간의 본성이다. 반면에 어쩔 수 없이 급한 일이 있어 그렇게 가는 사람은 빨리 감으로 발생하는 것을 감수한다. 하지만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는 것을 보이려던 사람은 교통 딱지를 받으면 억울해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이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거절하는 변명을 찾고 또 다음에 만나서 미안해하는 것 보다 쉬운 일이고, 또 남에게 부탁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수고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굳이 이유도 없이 내가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빨리 가는 것 보다, 알맞게 가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알고 사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것이다.


의외로 사람은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는 것 보다, 그런 주장을 수용하면서 사는 것이 쉽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감동을 받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예수님의 멍에,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 있다.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이 그것이다. 스스로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표현될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살면서 일어나는 일 앞에 사람은 순종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망치가 못 박는데 사용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또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과 삶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 그들은 망치로 고기를 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것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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