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던 그 당시에 대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먹지 않으니 귀신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으니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반응 없는 세대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병으로 본다면 문둥병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 계실 때, 그 세대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가 그랬다면 지금은 더하면 더한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주변의 일에 무관심한 것으로 가늠한다고 해도, 오죽하면 고독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세대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시대 현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은 해야 할 일,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길 가다가 피리 소리가 들리면 사람이 춤을 추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씀은 다 자신과 상관이 있는 피리소리, 또한 애곡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목적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아무 것도 먹지 않으니 귀신들렸다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니 먹는 것을 탐하고 죄인들과 친구가 되었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상황에 따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보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성경의 말씀이라도 자신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연구하는 사람은 학문적 성과나 믿기 힘든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가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에게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귀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 있는 자는 사람 몸의 한 기관으로서의 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암호라는 것이 있는데, 평범한 말이지만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암호라고 한다. 한국 사람에게 숫자 4는 많은 경우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서인지 나쁜 숫자로 인식된다. 즉 숫자 4가 좋지 않은 수로 들린다는 것은 한국인의 귀라는 말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와 같다. 한국인이 아니라도 숫자 4는 다 인식한다. 객관적인 인식은 다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문자만 알면 다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숫자 4를 수로 인식해도 한국인과 서양 사람들은 다르게 느끼듯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고 믿는 것과 그것이 자신에게 마치 한국인에게 숫자 4가 가진 의미가 주관적으로 전달되듯이 성경을 듣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귀가 없는 이들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을 하셔도 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귀가 없다는 것, 그것은 성경도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도 왜 주셨는지 목적과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에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와도 모르고, 하나님이 약속한 예수님이 와도 못 박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온 인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가리켜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오신지 카이로스 시간 개념으로 2,000년이 넘은 이 시대도 사람들은 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모른 체 그냥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성경의 기적들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신념을 동원해 가면서 믿으려고 한다. 그런 관점은 다 귀가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에 널려 있고, 밤이면 온 하늘이 교회의 빨간 십자가 네온으로 넘쳐나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이 그 많은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들이 말씀을 주신 본질을 외면 한 체 객관적인 사실로 믿으려 하고, 무엇보다 신앙을 힘입어 이 땅에 사는 동안 복 받고 성공하는 삶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듣고 믿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관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픈 일이 생기면 같이 슬픈 그런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아닌데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은 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야에서 유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치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없으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도 성경을 믿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믿기 어려운 어떤 것을 믿는 것에는 신념보다는 학문적인 연구로 인한 증명이 더 효과적이다. 아마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신앙도 학문이 되어 신학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문자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하지 말라는 말을 강하게 이야기 할 때, ‘그거 하면 죽을 줄 알아라.’라고 말한다. 그것이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듯, 성경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분명히 문자로 표현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다. 그런데 그 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 하는 것, 그리고 그 문자가 기록한 것을 사실로 입증하고 신념으로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사람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례 요한을 보고는 금식한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는다고 비난하는 것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라도 성경의 의를 모르면 성경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자신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연구할 문제가 아니다. 신념이 더 필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믿음이 없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분과 보는 것과 가치관과 생각과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같다면 성경이 온통 거짓말이라도 알아들을 사람 곧 귀가 있는 사람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계시는 사람에게 사람이 들어야 하는 말씀을 사람이 모르게 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와 가치관이 아직 다른 문제이지 믿음이나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즉 예수님과의 관계가 피리를 불 때 춤을 출 수 있는 상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성이 믿음이고 생명이다. 같은 생명은 그 생명의 고유한 행동을 이해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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