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19 세례 요한의 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14. 16:14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지적한 연고로 붙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증에 스스로 의심이 들어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신지에 대하여 물어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천하의 세례요한이 어떻게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다른 면으로 본다면 그런 의심 한번 하지 않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어떤 시대와 세대의 오늘에 읽어도 그것을 대하는 그 사람의 현재 자신의 말씀으로 읽혀지는 것이 가장 제대로 성경을 읽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보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의가 아니라 문자로 성경을 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신지를 물어보라고 한 것은 오늘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볼 때 신앙의 여정에 있어 누구라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을 전하고자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표현되듯 그 자아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념과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는 세계를 말한다. 여자는 성경에서 늘 형식을 나타내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앙이 교회에서 또는 성경을 읽고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보다 더 온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세계를 기웃거릴 때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기웃거리는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더 온전한 세계는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듯,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자기 심령 안에 있어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마치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금할 길이 없이 된다는 것을 아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 정말로 성경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세계인 행위와 소유의 신앙에서 존재가 먼저 확립되면 그 존재에 맞는 행위가 나타나고 그 존재에 맞는 것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이 세계를 의심하고 경계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곧 율법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다. 율법의 세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세계다. 율법이 명하는 어떤 행동규범은 의지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이 그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것이 안에 있으신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신 것이다.


그것에 반해 율법의 세계는 율법에 기록된 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어떤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자신의 행동을 규칙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천 가지를 평생 잘 지키다가 어느 한 순간 단 하나, 그 작은 한 순간에만 지키지 않거나 지킬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다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야구에는 퍼펙트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투수가 단 한 명의 주자도 내 보내지 않고, 점수도 한 점도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단 한 명의 주자 그것도 다른 선수의 실수로 주자가 나가기만 해도 퍼펙트는 깨진다. 그리고 그 깨진 게임은 퍼펙트냐 아니냐? 라는 관점에서 보면 점수 100점을 주고 패한 것과 같은 것이듯 율법도 그런 것이다.


그런 세계에 있던 세례 요한으로서는 당시의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는 예수님께서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면서도 어떤 신앙에 대하여 검증할 때는 자신이 타락한 교회에서 인정하는지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은 어떤 논리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증거들을 제시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는 것을 세례 요한하게 가서 이야기 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가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이다. 세례 요한에게 그렇게 답하신 것에는 세례 요한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례 요한이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의 표현된 모습을 메시아의 정체성으로 보는 세계의 최고봉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육신이 병든 사람을 고치고, 육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는 것에 있지 않다. 정작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내려오지도 못했고, 세금도 못 내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이나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린 사람도 다 죽고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이라면 오늘 우리는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를 병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사람 본연의 정체성이 각종 병과 같이 아프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가난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그 메시아의 본성이 입고 오신 육신을 통해서 육신을 가진 자로 대변된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찾는 것이라면 왕궁에서 찾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본질인 자신이 아니라 옷과 같이 자신의 육신이 가진 문제가 귀하게 되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문제이므로 세상의 왕이 사는 왕궁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다른 선지자보다 큰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과 예언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니 그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신이 전하고 외쳤던 모든 것이 실제로 나타나서 증거가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말 한대로 선진들의 전한 증거의 원천인 약속을 보았고, 그 모든 말씀이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 보다 나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자, 곧 육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는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런 가치관에 있어서 최고는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도 천국에서는 작은 소자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화가가 그린 꽃도 오늘 피었다 지는 향기 나는 작은 꽃 보다 못한 것과 같은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나라의 본질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심령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이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행동 규범으로 아는 가치관에 사로 잡혀 있다. 그것은 오네시모와 같이 옥에 갇힌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그러니까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늘 애써도 끝나지 않는 한없는 수고에 갇힌 것이다. 그래서 짐이 가벼운 예수님께 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관점에 대하여 정말로 본질에서 비롯되는 본성이 바로 언뜻 읽을 때 <행하라.>로 보이는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때로 세례 요한과 같이 그것이 의심스러워도 자신과 세상과 또한 말씀을 잘 살펴보면 왜 성경말씀이 병든 자를 낫게 하는지, 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정말로 생명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또한 생수와 같이 자기 안에 땅에 심겨진 한 알의 씨앗과 같이 심겨지듯 듣고, 그 말씀이 잉태되어 예수님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본성이요 말씀과 같아서 예수님께서 그 본성을 표현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행동 규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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