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사람이 따라 가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 사람도 따라 가야 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목숨을 버려서 자신은 사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은 형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불을 밝히고 사라지는 초와 같이 이 육신이라는 삶의 장막이자 형식을 소진해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하는 창조 목적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목숨이라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무생물이나 심지어 사회의 제도와 같은 것에도 살아 있다고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목숨은 정말로 단순하게 육신에 한정하는,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는 것 그것 하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생명은 의도와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으면 산 것이고, 목숨은 육신이 숨을 쉬고 있으면 산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목숨을 버리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몸 가진 인생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를 지켜내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교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라 일상에서 늘 있어야 하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 복음은 순교하는 특별한 상황과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 외에도 그냥 매일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은 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람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눈뜨면 일어나는 집에도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있어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집을 나와서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제법 많은 이들과 마주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때로 그렇지 않은 날과 세월이 있어도 우리의 삶은 그렇다.


그렇게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처음에는 선악과를 먹은 인생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 같이 자기가 마주하는 일과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나 법은 물론이고 자신이 살아오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것과 여러 가지 가치 기준에 의하여 누구나 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사람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실재로 어떤 부부가 삶은 감자를 찍어 먹는 것이 소금이다 설탕이다 하면서 결국은 이혼을 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다들 그렇게 작고 사소한 일에도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다 있다. 그건 누구나 살면서 자신을 조명해 보면 매 순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순간 상대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법과 기준과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용납되지 않는 죄인이라 주장하는 그 주장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가진 세상적인 가치관, 또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그 가치관에 나를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빌라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인하여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 가셨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주장이 옳다고 수용하면 그것에 따르는 희생이 수반된다. 어떤 일은 분명히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인데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잘 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대로 두면 많은 경우 일을 그르치고 그렇게 되면 일을 수습하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희생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상의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유대인과 로마인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었는데 그렇게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크게는 나라간의 전쟁이고 작게는 우리가 만나는 일상에서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은 많은 희생과 수고가 따른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볼 때 선하게 여기는 선한 일을 베푸는 것은 사랑의 변방에 있는 것이고, 자신이 옳다 주장하는 그 주장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다.


그런 수고와 희생은 필연적으로 육신을 가진 삶을 소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과 같은 생명으로 소진하고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은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이기에 육신의 모든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목숨을 버리고자 한다는 것은 육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선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삶을 산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두가 자기 삶이 옳다고 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추구하며 사니 세상은 항상 소란하고 갈등이 넘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가 만연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함을 인정받는 것은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는 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주장하는 것 그것이 선이라는 것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 딱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 자신의 가치관이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 주장하는 그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내는 생각과 그로 인한 상황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은 내 생각 아닌 모든 것에 순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함이다. 사람의 육신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산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평화의 왕인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가 가다가 휴지를 주우라고 하면 주워야 하는 것인가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떨어진 휴지를 보고 그냥 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또 세상이 자기에게 준 권세로 그것을 주우라고 요구하면 줍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렇듯 어떤 일 앞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요구되는 것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았을 때 십자가에 그렇게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반대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육신의 번거로움과 육신의 체면과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에 대한 자존심을 챙기고 얻는 삶이다. 그런 것은 누구나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신앙 안에서 보면 문제가 좀 다르다. 그러니까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고 선한 것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맞지만 그것을 그렇게 강제하듯 주장하는 순간 자신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바로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을 강제로 전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진리는 언젠가 다 대접을 받는다는 것만 알아도 예수님이 진리라는 그 절대성은 결국 다 인정받게 되는 것인데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유대인과 같이 자신의 선함이 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나,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말씀이 싫은 사람, 생각지도 않고 있는 사람을 영업하듯이 교회에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다. 길에 가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잔치를 채우라는 것은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열심히 살아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 목숨을 버려가는 삶이 주는 성령의 감동이 있게 하라는 말씀이다. 길이라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고, 가장 사람을 강하게 권하는 것이 그 마음 안에 스스로 감동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고, 때와 무관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순교라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아니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상황에서 모두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고, 자신의 목숨과 육신의 평안과 안위를 위하여 추구하는 그 모든 주장 앞에 나를 내어 주어 십자가를 지듯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랑으로 사는 것,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범하려고 죽어라 애를 써도 항상 지키고 사는 삶이 되는 하나님 세계의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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