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보통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문제들은 많은 경우 상대적이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건강이 좋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의 십자가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경제적인 문제가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것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진 자신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자신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보편성이 있게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진 자기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는 독립된 자신의 인생,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것은 육신 가진 너의 삶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산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육신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육신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속한 육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행위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인가 어떤 나라에서는 실제로 그런 행사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아주 초보적인 결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은 그 명령의 표면적인 실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의미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아니다. 이는 이 블로그 요한일서에서 다룬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또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보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고, 반대로 의미만 알면 되지 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거나 필요 없다고 하면 영지주의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마치 생명의 본성 곧 유전자가 그 생명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의 의와 목적이 사람 안에 생명처럼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그 의가 사람 안에 생명의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으면 예수님과 같이 자기 십자가 곧 육신 가진 삶을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으로 인하여 실재로 십자가를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보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앞서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사람 안에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이 회복되어 사는 삶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육신을 가진 삶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며, 그 총화가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이 삶을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삶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하나님을 모르고 모독했다고 죄인이 되어 사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도 어떤 분야, 또 어떤 일에 마주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수긍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마주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분명히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려 하는 것을 수용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반드시 문제가 되고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수고를 감당하여야 한다. 바로 그 수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곤고한 일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 자주 인용하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마지막 대화가 그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반드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 손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정몽주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지켰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이상적인 국가에 대하여 자신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일이 잘못되면 버릇처럼 큰 일 난다고 말한다. 종이컵 하나 사용하는 것도 때로는 '사람이 그래서 되느냐?'는 핀잔을 들을 수 있다. 그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함에 굴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굴복한다는 것이 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하여 상대가 옳다고, 이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러면 사람들이 일에 따라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싶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 보다 더 급박하고 어이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는데 그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데 끌려 가셨다는 것은 온 인류의 구원하는 일이 망쳐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의 목숨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끌려 가셨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는데도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이 아니라고 죽이려고 하는 이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선하다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온 인류를 구원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죄인과 같은 사형수가 되어서 말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것이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다.


그러므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에서 무엇인 선한가를 다툼에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선하다고 주장하고 나는 틀린 사람으로 만드는 것 앞에 나를 항상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보다 더 심각하게 나에게 선을 주장하는 일이 죽을 때까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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