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고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는 예수님의 삶,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있으면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고, 그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런 삶,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자고, 또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세우고, 총독들과 왕들이 제자들을 끌고 갈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회에 제자들을 세운다는 것은 공회의 기준으로 제자들을 보겠다는 것이고, 총독들과 왕들이 끌고 가겠다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의미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일관되게 큰 그림만 보려 한다. 그러니까 노상 전도를 하고, 해외에 선교사로 가고,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칭찬 받을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보상을 바라거나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 복음을 전하고, 어떤 대상에게 전하느냐의 문제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 먼저고, 그 생명이 본성처럼 드러나는 이유로 인하여 살고 있는 자리, 또 전하고 싶은 자리에서 표현해 가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기쁜 일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들은 것이라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생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삶의 의미와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복음을 어디서 들었든, 그것의 크기가 얼마이든 무관하게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어리다고 고양이가 아니듯, 생명이란 아무리 어리고 약하고 또 어떤 상황이라도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다음에 몸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것과 두려워할 대상이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두려워할 대상은 몸과 영혼을 능치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내용과 형식 전부를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몸과 영혼을 다 멸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몸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요 형식이다. 이것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죽일 수 있다. 전쟁이나 범죄 혹은 교통사고와 같은 사고로도 그럴 수 있다. 인간으로서 그런 것도 두려운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이 있으셨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태어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존재케 하신 신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태어난 이유와 삶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영이시며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릇이요 성전이요 형식이라는 목적 그것이다.


사람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났다는 것은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목적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그 목적에 충실했는지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생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목적 실현에 관한 기준에 따라 육신의 장막을 벗는 일이 정해지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 목적을 잘 이루어 형식의 수명이 다 하였으므로 육신의 삶을 떠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목적으로 볼 때 더 이상의 가치가 없어서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머리카락도 다 세신 분이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또한 우리의 몸이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몸은 죽여도 영을 죽일 수 없는 존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영과 몸을 같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목적 안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대한 기준과 그 기준에 따라 몸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안다면 몸 밖에 죽일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러니까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과 총독과 왕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 혹은 그들보다 더한 이들 앞에서라도 예수님을 시인,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혹 어둡고 감춰진 곳에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시인하고 집 위에서 외치듯이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시인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다 멸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과 인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능동적인 외침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 블로그의 주제에 가깝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능동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표현하는 수동적인 관계인데 어떻게 신앙이 능동적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신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객관적이고 실존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공회에 서고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게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몸은 죽여도 삶의 존재 목적을 아는 생명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고양이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주권을 안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개가 멍멍하고 짖는 것과 같이 너무 당연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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