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여러 고을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도 회개치 않는 것을 보시고 그들보다 오히려 그 당시 상업적으로 발달한 두로와 시돈과 같은 세상적인 고을들이 오히려 더 하나님께 회개하기 쉽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틀에 갇힌 것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더 하나님을 외면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로마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또한 인류의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동산에서 도망을 가려는 계획을 꾸미거나 하나님과 한번 싸워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타락을 했다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늘 계시면서 복음을 전한 동네이다. 그것은 다른 고을에 비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나 말씀을 더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망하리라 한 두로와 시돈과 같은 이방인의 도시보다 회개치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몰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끔씩 만약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구름타고 오시고, 그 모습을 인터넷으로 또 위성으로 생중계 한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생각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기 몸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기준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의하여 채색된 것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의 뉴스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객관적으로 보도되어도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을 생중계해도 어떤 이는 조작이라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할 것이고, 또 극단적인 다른 종교는 죽이려 들 것이다. 그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사람들의 그런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사람들도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어떤 이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렇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발을 씻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까지 품속에 칼을 품고 다녔고,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는 또 다른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지금의 교회가 또 신앙이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하나의 일에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의결기구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조직은 의결기구가 있다. 심지어 교회에도 당회나 노회나 총회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결기구에 권한을 주어 때로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과 말씀을 어떻게 보는지, 또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까 가버나움과 벳새다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기적을 많이 봐서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책망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믿고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말씀을 그대로 지킬 수 없다. 적어도 한국에 사는 사람은 정확하게 계산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어렵다. 세전, 세후 어느 것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년말정산 후에 세금을 더 낸다면 또 어쩔 것이며, 직장 동료에게 얻어먹은 커피는 어쩔 것인가? 그런데도 말씀을 객관적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편의적이다.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것에 불과하고, 그렇다는 것은 말씀을 결국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사실이라도 다들 다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교단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분이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 믿는 교리와 믿음이 왜 그렇게 많은가? 이런 모든 모순의 뿌리는 다 선악과에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스스로 정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맞다 주장하면서 다툼과 분쟁과 갈등과 죄악이 넘치는 것이다.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회개치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실존의 예수님을 보고 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고을이 회개치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기적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환호하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그런 권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그런 권능이 있어도 자신과 예수님이 상관없으면 그런 권능도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실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가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 그것이다. 오신 목적을 알고 믿는데 하물며 그 실존과 능력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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