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는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송사 곧 책잡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 시험하듯이 질문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건져내는데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고 하시면서 그 병든 손을 고치셨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하여 의논을 했다고 한다. 사실 출애굽기 31장에 나오는 말씀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양을 구하는 것은 엄연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용인하는 해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양도 구하는데 사람이랴?'는 반문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안식일에 대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여러 신학적인 고증이 있는 내용으로 알고 있음.) 하지만 단순히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시비를 거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외면하고서 그것을 지키려는 어떤 노력도 사실은 다 자의적인 해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해적이 자기들끼리의 치안 유지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자체적인 원칙을 만들어 다들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해적은 해적이라는 신분으로 숨 쉬는 것 그것 자체가 위법인데 그 안에서 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안식하는 날이 되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볼 때 안식하는 마음이 드는 상태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고 만족하시는 사람의 상태는 손이 마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손이 온전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만족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육신의 손을 한정하는 것으로 보면 그것도 유대인의 시각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성전이다. 성전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는 집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 성전에 손 마른 사람 곧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안식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오른손이라고 상세히 말씀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의로운 손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왼손으로라는 표현은 없다. 언제나 의로운 오른손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오른손은 의를 표현하는 손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 의롭다거나, 선하게 여기는 것을 오른손으로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밥은 오른손으로 먹고 화장실에서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왼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의로운 오른손이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오른손, 왼손의 일을 구분하라고 하시거나, 오른손으로 하는 일만 의롭게 여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나가다보니 사람들이 외식하듯, 즉 내용은 모르고 형식만 지키려 하는 것이 삶의 저변에 폭넓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들이 각종 미신과 징크스와 같은 것을 낳는다. 그런 모든 생각들이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고,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지금도 다 해당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손은 사람이 가진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람의 신체이다. 손과 발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행위나 행동으로 죄인 된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손이 말랐다는 것은 행동이 말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손으로 표현할 의가 말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손에 공급해줄 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의를 표현할 행동이 메말랐다는 말씀인 것이다. 한마디로 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손 마른 자와 같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성전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전에 하나님의 의가 없어서 표현할 것이 없어 메마른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주일날 돈 쓰고 일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은 다 손 마른 사람의 상태와 그 신앙 상태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그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오른손 마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것이 없는 사람이고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안식일의 목적도 의미도 모르니까 그런 것을 고민하고 또 나름 신학적인 견해라며 가르치기도 하지만 정작 가르치는대로 자신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어떤 날을 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라는 말씀이다. 즉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은 사람으로서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나니 하나님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셔서 안식하신 것이다. 프로스포츠 리그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때는 쉴 뿐 더 이상 일(경기)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또 안식에 대하여 정확한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토요일인지 주일인지, 아니면 그날 어떤 행동까지 가능한지를 따진다는 것은 다 성전에 있는 오른손 마른 사람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오른손 마른 자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듯, 우리도 그렇게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의가 없어 행동이 마른 사람의 회복,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안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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