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명을 또 사천명을 억이시고 또 바다 위로 걸으신 것이 알려질 만큼 알려져서 인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흐리면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표적은 구분할 줄 모르는가 하시면서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다시 말씀하셨다.


유대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그러니까 어떤 표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보였을 때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구를 하는 자들이 하늘을 보고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알면서 예수님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리고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교훈하시자, 때 맞춰 떡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을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에 대한 말씀인 줄로 알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직접 살면서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 주인공이기도 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이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그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있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과 같은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던 누룩 같은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에게 하늘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일으키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사람의 존재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하늘은 사람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주관하는 곳이 하늘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예수님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보이면 믿겠다는 시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치명적인 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계 안에 그런 생각이 늘 있었고, 또 지금도 있고, 장차 올 신앙들 안에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사는 시대가 객관적 시간으로 서기 몇 년이라도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경계한 누룩과 같은 생각은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시대에도 있는 생각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그 생각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때부터 있던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벗은 모습이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 시점부터 모든 인생들은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의 근원인 육신이라는 것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또 육신이 보여주는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것들을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런 생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벨탑을 쌓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내려와 봐!'하며 놀린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서 보이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했고 또한 자신들이 집 밖에 나가서 들키지 않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과 능력으로 보일 수 있는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화장실에서의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런 것을 감추고 싶은 사람은 그런 모습으로 표현되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께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적으로 보지도 않고, 그런 모든 것을 상쇄할 만한 기적들, 물 위를 걷는다거나, 암 환자를 한 순간에 회복시킨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그런 기적들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의를 전하기 위한 과정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의 본질이 아님에도)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생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기적을 구하는 생각이고 그들의 누룩인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런 생각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감추고 싶은 것을 다 잊게 만들 정도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지금도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시대의 교회가 부풀어 오른 것은 많은 부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그것이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각으로 보인다면 정말로 복음적인 관점을 가진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말씀으로만 보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결국 어떤 것이든 지키지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음에도)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이상할 것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또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의는 그런 안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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