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이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지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며 호통을 치신다. 성경의 사건으로만 보면 바로 앞에서 큰 칭찬을 받은 베드로인데도.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며 예수님을 만류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의도를 사단의 생각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사탄의 생각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 말씀의 뜻은 모른 체 그것을 형식으로 지켜내기만 하려는 외식하는 이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된다는데 그것을 말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오늘날 신앙인들 중에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베드로의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베드로의 모습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에 가려는데 막거나 방해하는 가족을 사탄이라 하고, 또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이들이 신앙 가진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그들을 짐승 같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다 이 베드로의 생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지키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앙생활을 위하여 직장을 옮기거나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심심치 않게 가족을 등지기도 한다. 그들의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에게 직장의 요구나 가족의 요구사항은 자신이 가진 신앙,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치거나 그것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거나 고난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막아선 베드로의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 신앙인들의 모습은 언뜻 굉장히 투철하고 신앙심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일단 신념이고 무엇보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그러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있어 자신이 가진 신앙이 고난을 받고, 죽어져 나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에 고난을 주거나 헤치려고 하는 것을 사탄의 계략이라고 오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우선 사회적으로 이해를 받기 힘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아들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자극적일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사탄의 생각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는 십자가에 대하여 많은 내용이 있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더 온전한 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는 이가 의를 알지 못한다고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심판 앞에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라고 수 없이 말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의 절체절명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늘 있는 문제라고 수 없이 포스팅을 해 왔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늘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 주장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제대로 된 것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아닐 때가 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흥분하고 네가 아는 것이 온전치 않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일깨우려 한다. 특히 신앙에 있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간의 절대적인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서면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이 아니라고 반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베드로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같이 그런 주장 앞에서는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장이 내가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더 의기충천하여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그런데 세상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인하여 시끄럽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짓누를 논리나 힘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목사라는 지위 같은 것으로.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 싶으면 직장을 떠나고 가족을 등지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온전치 못한 의와 생각, 내가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지는 것이다. 그것이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고 할 때 죽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잘 못하는 사람에게 핸들을 맡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운전을 더 잘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수고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고, 그것이 핍박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뜻을 아는 사람이 수용하면 정말로 힘들다. 인생이 돈이 전부가 아닌데도 돈에 대하여 스트레스 받아야하고 또 벌기 위해 수고해야 하며, 교회에 가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남들 쉴 때 수고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심과 같이 우리 육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의 법을 온전히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조금 안다 싶으면 그것을 모르고 신앙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심판하며 정죄하고 그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게 된다면 그것을 사탄의 생각이라 하며 정죄한다. 하지만 그런 신앙인들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모습이고, 십자가를 벗어 던지는 모습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님도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고서 살아가는 삶은 원래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로 인하여 피곤한 게 정상이다. 그런 피곤함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피곤함의 결과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고백을 낳게 하는 것이다. 그런 수고가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런 고백을 들을 때 감동이 영광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고백을 낳게 하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 법과 구조를 알고 경험하는 삶은 육신은 피곤하나 그 영은 영광스럽고 늘 기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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