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그 아내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에 대하여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천사가 현몽하여 자초지정을 알려 주기 전에는 당연히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이고 자신을 배신한 약혼녀와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리아의 죄를 묻지 않고 조용히 끊으려 했다. 아담은 그의 아내였던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그것을 권하자 거부하지 않고 먹었다. 이것이 이 두 사람의 다른 듯한 공통점이다.


요셉이 마리아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주목 받을만한 구절은 아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여기에는 매우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겨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잉태되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거듭나는 과정 안에는 요셉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시작 과정에서 아담 역시 요셉과 비슷한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 안에는 이러한 과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한마디로 내용이 형식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물론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오해한 것이고, 아담은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감당했다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다 내용과 형식이 있다. 특별히 남자와 여자는 육신으로 남성 우월주의를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것이 도입이 되었는데, 남자는 내용이고 여자는 형식에 늘 대비 된다.


이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에서도 남자는 그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역할만 하고 실재로 아이는 여자의 뱃속에서 자라지만 정작 그 성씨는 남자의 성씨를 따르는 역사적인 사회 풍습도 그런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에는 그것이 아주 심해서 여자는 제사에도 참여 못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유산도 받지 못하는 문화권 속에서 성경이 기록되었다.


남자는 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고, 여자는 형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에 도입된다. 그런 맥락에서 여자는  부정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되는 것이다. 그런 여자를 더욱이 악행에 대하여 아담과 요셉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들을 실은 것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을 수용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과 반대로 사람의 육신이 부정한 것이라고 부인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몸에 거하면서는 유대인의 율법과 종교적인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인이 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즉, 요셉이 자기 입장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를 용서하듯 자신을 물리며 조용히 물러섰고, 아담 역시 하와가 따 먹고 물귀신처럼 같이 먹자는 유혹을 뿌리치지 않고 먹은 것은, 예수님께서 늘 마음에서 부정한 생각이나 하고 화내고 모순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거듭난다는 것 역시 연약한 육신, 부정한 육신, 형식과 같은 이 육신을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셉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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