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신앙 생활은 사람의 부정한 것을 버리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신앙은 성공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설사 지난 100년간 자기 안에서 화를 내는 것이 부정하다 생각하여 화를 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음 나선 초보 운전 길에 급하게 끼어든 차에게 화를 내면 그는 화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재로 많은 종교 안에서는(교회 역시 예외가 아닌) 이렇듯 사람 안에서 나오는 화 내는 것이라던가 사람을 미워한다든가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것을 다스리고 이겨내는 것이 신앙심이라고 가르치고 또 많은 교인들이 이것을 이겨내려는 신앙 생활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종교가 존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서는 그런 것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화를 낼 수 있고,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미움이 남아 있고, 늙었다고 성욕이 없어지는 것 아니며, 화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그와 반대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마저 부정하게 여기는 이 육신을 입고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이 부정한 육신을 용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들이 가진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육신을 가지고서 이 육신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그것이 고백이 될 때 구원이 있다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구원을 소개하시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는 아담이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고 할 때 같이 먹는 장면에서부터 예언된 것이고, 요셉이 자기로선 부정한 여인으로 비칠 수 있는 마리아를 용납해 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다고 하시며 요셉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사실 육신을 가진 예수님은 부정했다. 당시의 종교인들이 볼 때 너무 부정한 사람이었다. 안식일도 범하고, 성전의 기물을 부수며, 부정하기 이를 데 없는 세리와 창녀들과 같이 먹고 놀고 있으니 의가 다르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부정한 존재 그 자체였다.


만약 우리시대의 종교들이 가르치듯이 사람 안에서 나오는 각양의 부정함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 이겨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창녀를 멀리하고, 안식일에는 숨도 쉬지 않듯 사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전혀 반대였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와 모든 종교들의 방향이 예수님의 방향과 반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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