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이 부정한 마리아를 용납함으로 나심이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사람이 보기에는 부정해 보이는 것을 용납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신 그 인생을 부정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부정한 것을 용납하는 것, 사람이 생각할 때 부정하다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좋아하셨다는 것을 감사하고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잉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결국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그 기준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세리와 창녀들과 죄인들과 함께 다니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형당한 죄목이었고, 그렇게 예수님께 죄를 메긴 유대인의 안목은 요셉과는 달리 부정한 것을 배척하는 것이었고 심판하는 것이었다. 그 유대인이 요셉이었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듯 육신을 부인하려 한다. 육신 안에서 나오는 온갖 생각과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안에서 배척하려 하고 늘 심판하며 금하려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실수하셔서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이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일이시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들도 태운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욕망을 그대로 다 표출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가? 이 질문은, 사람이 자기 안에 욕망들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보통 종교인들이 말하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 사회적으로 아주 도덕적이고 사람들이 볼 때 칭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적인 기준에 대하여 세상적인 것으로 이긴 분이 아니시다. 즉, 사람이 세상적 가치관으로 인간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세상적인 노력이나 제도나 재물이나 권력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내가 하늘의 군사들로 저들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 그것 때문이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지는 것이다. 그 패배가 하나님 앞에서 이기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각양의 생각들, 그 생각들을 부정하게 여기는 세상적인 관점들이 있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정죄하고, 신분을 보고 사람의 가치를 메긴다. 사람이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표현할 때 천박하다 여긴다. 다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이다.


우리는 그것 앞에서 늘 죄인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늘 죄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그런데 그것을 피하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 한 인간의 본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며 그것을 부인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정한 기준 앞에 죄인이 되셨는데 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존재들의 행위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에 물든 유대인과 로마인에 의해 죄를 받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안에서 있고 표현되는 욕망들, 사람들이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는 그 욕망들이 표현됨으로 죄인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피하려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세상의 기준 앞에 죄인이 되어 드러나고 그것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비로서 그를 살리신다. 


이런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활한 사람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 나온다. 여기에 이르지 않고서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늘 부정하게 여긴 우리의 본 모습을 인정하는 것으로 어떻게 경건한 사람이 되는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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