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밀은 목적이라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절제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마트에서 물건을 훔쳐도 되고, 길을 가다 맘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언제라도 모텔로 가도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결과를 유발하기도 하는 욕망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교회에 다니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거나, ‘나는 속세를 벗어나 불가에 입문했으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앞에서 고상한 척들 하지만 실상은 너나 나나 다 그런 욕망이 있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각양의 욕망과 연약함과 감정들을 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아래에서 볼 때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위험하다. 그래서 모든 날카로운 것은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제어를 받는다. 하지만 칼을 만드는 사람은 날카롭게 만들면 만들수록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칼의 목적이 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 아래에서 보면 그렇게 제어하려 한 날카로움이 의로운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각양의 부정함과 연약함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그런 특성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달성하는데 너무 적합하다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각양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또 연약한 육신을 주시고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목적 안에서는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의 어떤 성향이라도 다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며 억제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목적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방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식칼이라는 것이 목적 안에 있으면 먹고 사는 것에 아주 유용한 것이지만 그 목적을 벗어나면 흉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존재가 목적 안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다. 즉 어떤 것이 그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면 죄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죄가 바로 이것이다.(원어로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는 의미)


그러므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어떤 일에 화를 내느냐 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의한 것을 보고 화를 내지 않고, 사람은 경건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각양의 모습들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 놓으신 목적 안에서 표현되면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