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8-25 성령으로 잉태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9. 11:27 Writer : 김홍덕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마 1:20하)

마태복음이 신약의 처음이고, 또 그 중에서 1장에서 성령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신약을 기준으로 여기에서 성령이 처음 언급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고 나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오시는 과정인데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잉태되었다는 것은 마치 <터미네이터 1> 에서처럼 미래에서 온 사람(후손)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상한 모양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어떻게 보면 알쏭달쏭한 이런 의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잘 알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마 1:21)고 하셨는데, <죄>라고 하는 것은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 곧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죄의 원어는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이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창이나 화살은 과녁에 맞을 때가 자기 자리인데 그것에서 벗어난 것은 죄라는 것이다. 또한 주기도문에서는 죄를 빚(debt)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할 빚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빚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구매하는 것은 그 스마트폰이 전화와 내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해줄 것을 기대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스마트폰은 구매자인 주인에게 전화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구매자인 주인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죄 가운데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원래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에 비해서 보면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부엌칼은 요리하는 것에 사용되기 위한 목적 안에 있는데 그것에서 벗어나서 아무리 다른 것을 잘 베어낸다해도 그것은 위험하며 목적을 벗어난 상태가 되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런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목적을 위하여 지음 받고 부름 받음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We)>의 개념과 같은 것이다. 


테니스 동호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한 동호회를 말할 때 당연히 우리라고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아야 하는 백성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 백성의 죄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면 교도소나 옥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것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뜻을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 구원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의 왕이 되는 것으로 세상 죄에서 사람을 구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위대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방해가 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육신을 가졌기에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루어내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너무 보잘 것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모습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 받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이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함으로 죄를 시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형상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이 되는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바로 그 감동이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보는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또한 자신이 위대함을 추구하던 삶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목적하신 정체성이 아닌 죄악 중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 감동, 그 감동을 주는 그 영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우리 모든 인생들의 마음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잉태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심령으로 우리가 살게 하시는 법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부장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마음 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바로 그 고백을 자아내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의 임무라고 할까 성령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우리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을 때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성령의 감동을 주면서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심의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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