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이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0. 11:42 Writer : 김홍덕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다.(마 1:21)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은 몇 가지가 더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임마누엘'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이다. 그 각각의 이름은 다 의미가 있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의미가 대단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옛 철수 영희처럼 흔한 이름이었다. 즉 그 이름의 희소성이나 의미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름과 같은 일을 실재로 하셨기 때문에 그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 된 것이다.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자손 곧 왕족의 혈통으로 오신 것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기 백성'은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 본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이해하기 쉬울듯하다.


즉 자기 백성, 예수님이 가장 먼저 어떤 백성의 세계를 열었고, 그와 같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죄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이 가진 생명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의 처음이고,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되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인생의 목적을 보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인 예수님의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는 그 상태를 바로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요 17장) 계신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인 사람인 것이다. 이것을 굳이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상태에 대한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옛날에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임명하는 신분이 세 가지가 있었다.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인데 대표적으로 왕과 제사장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왕이요 제사장이신 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왕은 어떤 세계에 있어 최고를 말하고, 어떤 나라의 통치이념을 가진 존재, 다르게 말하면 통치이념이 육신이 된 존재를 왕이라고 하고,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분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세계는 이 땅의 어떤 정치적인 나라, 국가론에 의한 나라의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세계에 있어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첫 열매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준이고 표준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해서 표현된 존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기준이고 표준이고 그 세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존재이자, 그 세계가 육신으로 성육신 된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라는 기준에서 빗겨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도 아니며 구원을 받은 존재도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잔뜩 긴장하게 하는 표현이지만 피할 수 없는 명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명백한 기준과 법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독생자이신 것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와 신앙이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런 것을 설명해 갈 때 마다 현재의 교회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신앙은 십자가와 반대인 것이 많다. 세상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도덕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도 오류다.


먼저는 도덕이 복음과 결합할 수 없음이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정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생명의 방향성이다. 그리스도인이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 도덕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도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도덕적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삶을 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기에 죽어서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진 것은 도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 것이기에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또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한 사랑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면 다 거짓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도덕적인 생명이 없는데, 사후에 잘 살겠다는 이유로, 또 세상 사람들에게 욕  먹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외식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도덕이 이러한데, 세상에서 성공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가장 타락한 신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라고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생명이다. 국화꽃을 내는 줄기는 그 생명이 국화이기 때문이다. 복숭아가 열리는 것은 복숭아라는 생명이 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그 이름과 같은 생명이 그 분의 정체성이여서 이름과 같은 삶을 표현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이름 같은 삶을 보이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런 삶을 살도록 지어진 존재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우리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평생 애만 쓰는 신앙인으로 남을 뿐이다. 성경은 그저 요원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에서 자기 백성이라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생명,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그 목적이 회복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이자 이미지인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구원이 있고, 또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인생의 내용과 목적이 우리의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이신 것은 또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런 상태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모든 이름은 나도 그러한 삶을 살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돈 달라, 밥 달라, 배우자 달라고 기도할 때 서명처럼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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