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특히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상황에서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에 대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다. 이것은 육신으로 사람이 임신을 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마리아에게도 나타난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요셉은 아직 자신이 동침하지 않았는데,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의 증상을 보이니 이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19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자신이 동침하지 않은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큰일이 날 텐데, 그 당시는 더 심각한 문제라서 아마 요셉이 이를 세상에 알렸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이 단순히 요셉이 아주 신사적인 사람이라서 마리아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조용히 끊고자 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만약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라면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고, 이것에 관해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동침하지 않은 약혼녀가 임신하는 사건을 겪는 일이 많지 않다. 만약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자세라면 이 구절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관한 것을 기록한 성경이 아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일을 다 적으려 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 어떤 이에게는 무관한 것을 기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은 왜 기록된 것인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목적인가? 만일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여자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부터 예수 믿을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있는가?


성경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누가 되었던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믿기 힘든 기적이 사실이라고 믿는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신념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그리고 믿었다 치자. 성령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잉태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출발이 이미 다른데?


성경을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예수님의 나심의 사건은 오늘 우리의 영적인 이야기가 되어 나의 모습을 비추어 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육신의 나심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심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나는 것이 예수님의 나심과 같이 성령으로 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메시야요 그리스도요 영화에서 표현하는 영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사람은 이래야 한다’라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표준이 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 이전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있는데 또 올 필요도 없고, 성경은 예수님을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하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각자 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사람은 예의가 발라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은 효도를 해야 한다’와 같이 다양한 그 마음의 그리스도들이 있었고 지금도 다들 있지만 그렇게 각자가 바라는 사람의 표준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대구에 계명대학교가 있는데, 본관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 벽면에 아주 큰 빈 액자가 있다. 그것을 <타불라 라사(Tabula Rasa):헬라어로 ‘비어있는 판’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는 이 학교가 바라는 인재상이 있는데 아직 찾지 못해서 빈 것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의 상이 다 달랐고, 또한 온전한 인간의 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상(像)이요 사람의 표준이요 사람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나타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려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기준이고 표준이 성령으로 인하여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이 마치 여인에게서 아이가 잉태되듯 하나님의 영을 품게 되면 누구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또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무한한 자유의 말씀인 것이다.


만약 예수님은 되는데 나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믿을 필요 없다. 예수님이 되면 나도 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고생스럽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어차피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생명이 잉태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아들이 태어나듯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심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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