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지금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중인데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이유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면 왕이 되실 것이라 생각했다. 향유 옥합을 이야기할 때 나오겠지만 예수님은 왕이 되러 가시는 게 아님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가룟 유다다.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된 세상을 꿈꾸며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여정 중에 누가 큰지를 논했다. 이에 예수님께선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앞에서 첫 번째 가는 사람이 되려면 뭇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한 역설법이나 첫 번째가 되기 위한 비법 혹은 수단이 낮아짐이라고 가르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높고 낮은 기준이 다른 세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임을 알고 보아야 한다. 겸손하면 사람들이 높이 추켜세울 것이란 말씀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세상이 보기에 낮은 존재일 뿐 실상은 하나님이 귀하고 높게 여기시는 생명이란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말씀하셨으니 다른 사람보다 어느 방면에서나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다스려 낮은 자세를 취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단순하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니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일 뿐이다. 다만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삶은 세상이 볼 때 아주 낮은 삶으로 보일 것이란 말씀이다. 사실 십자가보다 더 낮은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에도 십자가를 지신 것은 부모가 힘과 능력이 아이보다 월등함에도 아이에게 지는 건 부모라는 본성 때문이듯 그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기도로 다스리신 게 아니라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자기 옳다는 주장 앞에 내 육신의 수고와 생명을 내어주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이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에서, 세상에서 비교 우위에 서는 걸 성공이라 믿는다. 심지어 신앙도 이 공식에 대입해 놓았다. 그래서 강대상이 높다. 높이가 아니라 가치가 높단 이야기다. 본성은 이런데 육신의 말과 자세가 낮아짐은 본성으로 인한 게 아니다. 이런 낮아짐은 진심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짐을 통해 높아지는 속임수일 뿐이다.

 

세상과 사회에서 높아지고 이기기를 바라는 신앙은 거듭난 게 아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건 어린아이는 세상에서 더 큰 자,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본성이 높아짐을 추구하지 않기에 아이를 본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핵심은 본성에서 비롯된 낮아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몸이 어른임에도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두고 어린아이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세계나 높은 것을 추구한다. 가치란 게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생명에게 가치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선 헌법적 가치지만 북한에선 반국가적 이념인 것처럼 세상 기준으로 보면 십자가는 정말로 낮고 천한데 하나님이 보실 땐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관점에서 서로 누가 크고 높은지를 논하는 제자들에게 낮아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질은 몸의 자세나 말로 낮아지라는 게 아니라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임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아짐은 곧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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