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라 하셨다. 문제는 그 시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점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다. 사람은 대게 이때를 세상의 종말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인 시점에서 그 말을 듣고 있는 이들을 향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 일을 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는 지금도 재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다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당시 사람 중에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란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천지창조가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일이듯, 예수님의 재림도 각 사람에게 예수님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으로 임하는 일이다. 그리고 종말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세계 이전에 각 사람이 가진 세계와 그 가치관의 종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많은 성경의 약속처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기회의 축복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이란 영원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다시 오시겠지만 본질은 각 사람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재림의 본질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다시 오시는 것

 

오늘 우리는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구원을 얻을 수 있듯, 언제일지 모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볼 수 없어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이 있어야 한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그 이전에 각 개인에게 임한 재림이 재림의 본질임을 확정하기 위함이다.

 

이 본질적 재림은 초림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듯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000년 전에 the Christ로 오셨고, 지금은 the Christ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각 사람에게 임한 재림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의 수가 이제 많으므로 구름 같다고 하신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많은 사람은 교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시점은 사람이 교회를 만날 때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교회다. 교회를 만나서 자신이 예수님 말씀과 달리 세상의 영광을 좇았다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순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때 함께한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만났고, 성령이 임하시니 회개했다. 회개한다는 건 이전의 자기 삶이 부끄러운 삶이었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와 신앙은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을 부르고, 실패한 사람이 온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기려고 하고, 이겼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 믿는다. 이런 교회를 만나 세상에서 이기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부끄럽게 여길 수는 없다. 그러니 재림도 기다린다. 아직 그들에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게 복음일 수 있다. 이건 자기 죄를 시인하는 일이다. 낮아짐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몸소 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영광을 좇았던 자기 삶이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는 건 예수님이 자신에게 재림하는 일이자 진정한 교회를 만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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