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대의 음란함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성경을 논하거나 묵상하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부끄러워하고 외면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선 영광으로 여긴 길을 사람은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물론 기독교인들도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낮아지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 반대로 세상에서 낮아짐을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기고 패자와 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본심이다. 그 본심은 “예수 믿는 사람이 남보다 못한 삶을 살아서 되겠냐?”로 표현된다.

 

낮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같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직접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한다면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는 삶을 외면하는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세대의 음란함은 무엇인가?

예수님과 사도들은 물론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는 그가 살던 시대를 음란하다고 말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항상 매춘이나 간통과 같은 일이 있으니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육체적 음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음란을 무관한 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육신은 생각을 표현하는 개체기 때문이다.

 

여러 포스팅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남녀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대변한다. 이것을 논리적 용어로 바꾸면 내용과 형식이 된다. 남자는 의와 내용을 가진 존재, 여자는 형식을 표현하고 낳는 존재란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 무엇보다 형상이라 표현한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관계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와 가치를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그 존재 목적을 버리고 다른 의와 가치를 추구하고 자기 의로 삼는 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이다. 따라서 어느 세대나 늘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는 음란은 세상을 주도했다. 그래서 늘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앞서 설명한 인생의 목적인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사모하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이다. 하나님께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도록 하면서까지 낮아지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보이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 높아지는 것이 의로운 것이란 가치를 사모하고 자기 의, 곧 자기 신랑으로 삼은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때 이런 사람을 부끄러워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말씀이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표현하는 삶인 낮아지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의 가치를 사모한 사람은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신 예수님이 보실 때 오히려 부끄러운 삶이다. 

 

그리고 이런 삶이 바로 천하를 얻고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를 좇았으니 세상을 얻은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부끄럽게 여기고 외면했으니 자기 목숨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그게 바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는 낮아지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란 것을 보이시고, 사람이 그 목적이 회복된 살아 있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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