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잠깐 시간을 내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지금 기독교인들로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결하게 생활했다. 지금 시대 신앙인들이 성경을 지키는 건 그들의 행동 양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목숨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많은 대화도 사실 예사롭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는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님을 반대한 부류로 재단한 상태에서 보기 때문에 그들을 깊이 보지 않는 경향도 있는데, 나중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다른 사람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그들은 단박에 자기들 이야기란 걸 알아들었듯 그들은 예수님 말씀의 취지를 꿰뚫고 있었다.

 

이혼에 대한 질문도 그랬다. 그들은 앞서 하신 손이나 발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는 예수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제자들보다 더 훤히 알고 있었다. 말씀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란 걸 알았다. 그 이해 위에서 그들은 신앙의 형식을 버려도 되는지를 결혼에 빗대어 질문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도 이 모든 상황을 아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반문하신 게 이를 증명한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이혼 증서가 있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 마음이 완악하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 뿐 결혼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므로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정리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 형식의 관점,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오늘날 언어로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죄가 없다는 것이라는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회개한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거듭나면 도둑질해도 괜찮느냐 반문한다. 그런 반문은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도둑질하는 본성이라 우기는 것임을 알고나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또 구원은 받았다고 한다.

 

이 괴리와 모순을 메우는 게 이혼 증서다. 오늘날 이혼 증서는 신학(교)에서 나온다. 나뉠 수 없는 게 나뉘어진 상태에 명분을 주려한다. 이런저런 말로 죄 없어야 받는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는 명분을 정립하려 한다. 원죄가 어떻고 자범죄가 어떻냐는 말이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육신을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스도로 났다면 이건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구원받았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고, 자기 검열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이나 사회적 이론 같은 건 필요 없다. 하나님이 도둑이 아닌 이상 도둑질하지 않는다. 남편인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된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사람이 나눌 수는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바로 이 법에서 비롯된다. 사람에게 정해진 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인데 이를 버리고 다른 가치를 좇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삶을 사는 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다. 

 

남편이 아내를 버린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 육신의 삶을 경건하지 못하게 사는 것이고, 아내가 남편을 버린다는 건 하나님의 뜻 아닌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건 생명이 바뀌는 일로 생명과 본성을 나눌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 났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므로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즉 남편과 아내가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눌 수 없다고 하시는 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로 났다는 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남편인 존재의 목적과 육신의 삶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런 삶은 생명과 본성을 나눌 수 없듯 나눌 수 없다. 그리고 이 삶이 바로 예수님을 위하는 삶이다. 표면적으로 결혼에 관한 말씀 같은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대답에 이런 깊고 재밌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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