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들은 복음의 절대적 개념을 설명한다.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물은 부자, 향유 옥합, 소경 바디매오와 같은 만남과 기적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 먼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를 물어온 부자의 이야기다.

 

한 부자(누가복음에선 심지어 관원이라고 밝히고 있다.)가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 물었다. 그의 질문에서 영생이 행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칭한 것에서 영생을 얻는 선한 행동이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건 사람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행동에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자에게 예수님은 먼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고 반문하셨다. 선의 대상과 기준이 무엇이냐를 이야기하고자 하신다. 그러면서 율법을 다 지켰는지 물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게 선한 행동, 영생을 가져올 선이라는 사람의 일반적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행위로 지켜내려는 사람에겐 신구약 가릴 것 없이 모든 성경이 율법이다.

 

특이하게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야 당연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은 행위를 의나 선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는 말씀은 선은 행함이 아니라 존재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가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자’다.

 

부자가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 예수님은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으셨다. 부자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다고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하다고 하시고, 가진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 부자는 근심하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가 재물이 아까워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면적인 이유가 다가 아니다. 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는 법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를 물어온 사람이다. 그의 재물도 영생을 얻기 위해 선하게 살아온 열매임이 분명하다. 즉 그에게 재물은 자신이 얼마나 영생에 가까운지를 말하는 지표였다.

 

그의 가치관은 단지 그만의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가진 일반적인 가치관이다. 사람에게 돈은 성실한 삶의 보상이자 열매다. 자산은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부유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돈은 곧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척도다. 그런 돈을 버린다는 건 결국 육신이 풍요롭게 안정되는 게 은혜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 부자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란 걸 알았다. 이런 측면에서 부자는 오늘날 신앙인들보다 생각이 있고 양심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부자가 되는 걸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라 말하고 천국에서 고래등 같은 집과 금면류관을 기대하는 오늘날 기복적이고 유물론적인 신앙인들은 이 사람을 조롱한다. 재물이 아까워 예수님께 등을 보였다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다. 이 길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라고 믿고, 예수님이 그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와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계속 갈등하는 중이다. 이 부자의 근심도 바로 그 갈등의 한 단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