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 물었으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부연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랐다고 했다. 제자들이 놀란 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부유함은 하나님의 은혜고,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게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인하여 놀란 것이다.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모르긴 해도 하나님께 어떤 잘못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처럼 제자들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람은 이렇듯 육신의 형편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생각하는 지표로 여긴다. 이런 사람의 생각으로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늘 육신의 문제 해결을 돕는 구원자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건 돈 많은 사람은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다. 말씀의 의도는 육신의 형편은 하나님 나라의 자격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이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갈 사람을 일일이 정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천국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말씀이다.

 

이에 베드로는 우리(제자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그 말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아직 가슴에 칼을 품고 있었고(민족의 독립을 도모하는 열심당원이었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29-31)

 

현세(現世)와 내세(來世)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세내세는 어떤 세계인지 또 먼저나중의 기준은 무엇인지가 중요한데, 이 둘은 앞서 말씀하신 사람으로 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 영생과 구원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고 말씀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인 것처럼 현세와 내세, 먼저와 나중 역시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거듭난 삶이 바로 내세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또한 먼저다. 존재보단 존재해야 할 목적이 먼저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이 사람에겐 가장 먼저이고 거듭난 내세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의 삶이 현세,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의 삶이 바로 내세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이후의 삶이 바로 내세이자 천국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고, 거듭났다는 건 하나님의 의(말씀)가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의로 살고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서 사는 삶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듭난 사람의 삶이 천국이 임한 삶이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세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전토를 버린 후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 역시 이 기준으로 하신 말씀이다. 간혹 이 말씀을 교회 다니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과 환경을 배척하고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걸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전형적인 이단이다. 백배로 얻는 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에서 얻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모는 육신의 가치관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가치관을 준 세상이 바로 부모고 형제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귀하게 여기는 게 바로 영생을 구하려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가 가진 재산이다.

 

그리고 내세에 백배로 받는 데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바로 핍박이다. 핍박도 함께 받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핍박은 삶의 평안을 얻기 위해 주일날 교회에 가야 하므로 특근을 거부해서 받는 눈총이나 비난 같은 게 아니다. 높이 올라가고, 평안하고 부유하게 되는 걸 하나님의 은혜와 선으로 아는 세상에서 그와 달리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의로 여기므로 받는 세상의 조롱이다.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만 질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전지전능한 능력에도 아버지의 피조물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다. 이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게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남은 육신의 가치관을 주는 부모, 육신의 정욕이 귀하게 여기는 재산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때 얻을 수 있다. 육신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은 높아지는 것이고 많은 재산을 얻는 것을 축복으로 아는 삶이다. 십자가는 이 반대에 있으니 복음을 위한다는 건 곧 이것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기에 하신 말씀이다.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먼저와 나중 역시 하나님의 기준으로 먼저와 나중이 결정된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으나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의가 그 기준이다. 육신의 가치관으로 볼 때 먼저 된 자가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보면 나중이라는 의미다. 복음을 위하여 부모와 전토와 자식을 버리는 것과 뿌리가 같은 개념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먼저 된 자는 육신으로 먼저 된 사람이다. 먼저 태어난 사람, 교회에 먼저 출석한 사람 그리고 육신의 가치관으로 볼 때 앞선 사람, 이긴 사람, 높은 사람, 부자가 되려는 경쟁에서 먼저 골인한 사람이다. 영생을 얻을 선한 행동을 물은 부자와 같은 사람, 육신의 가치관으로 이긴 것을 먼저라고 한다. 이들은 이런 먼저를 하나님의 은혜라 말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육신의 가치관으로 나중 된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 경쟁한 경쟁에서 뒤진 사람이다. 모두가 높아지기를 소망하며, 심지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높아지려는 중에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났기에 낮아진 사람, 그들이 바로 나중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가장 나중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은 그렇지 않다. 먼저가 나중이 되고 나중이 먼저가 되되 그 수가 많다고 하셨다. 즉 구원을 얻을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심지어 교회에 모여서도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기도하는 게 사람의 모습 전부일 것 같지만 낮아지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 하늘의 별보다, 바닷가의 모래보다 많다. 단지 이들을 알아보려면 거듭난 생명이 주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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