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는 자주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는 것이나 선교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때로는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자청하는 것도 그렇게 여기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 조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산 자와 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산 자는 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지체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그렇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모든 인생 중에서 먼저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산 자는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셨는지를 알아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 우리 지체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셨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아니 상식이 아니라 과학과 모든 지식으로 볼 때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니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일까요?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도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냐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어떤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



부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맛보려면 먼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일이 되기를 바라고 믿는다면 절대적인 조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죽음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이 땅에서 교회에 다니며 육신으로 살다가 그 수명이 다하여 죽고 나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시켜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수명이나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고 난 다음에 다시 육신으로 혹은 영으로 부활시키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은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은 죽으심이 아닙니다. 대속했다고 하니 다들 그렇게 알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이시고자 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를 지은 분으로 정의하는 세상의 법과 그 법으로 표현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인생은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인생은 자기 스스로를 볼 때 세상에서 옳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면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는 일이 잘 되고 또 착하게 사는구나! 그러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지!’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하여 차를 산 바보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러기 위하여 거하실 형식으로 만드신 것이지 이 육신이라는 형식이 형식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을 가진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빛나게 되도록 후원이나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죽음, 즉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고 성공이라고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음이 자기 인생에, 또 신앙의 여정에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을 위한 것이지 육신의 수명이 다한 사람을 위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 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 (로마서 1:1-7)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자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고 주장하며 사는 사람들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죽은 것과 같이 자기 육신을 섬기는 것에 내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보고서 그것이 옳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


바로 이 부활, 이렇게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세상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고서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일에 자신의 육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자기 지체를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으로 죽었다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다시 살리신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지체를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우리 지체를 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는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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