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23) 종과 아들의 차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7. 07:00 Writer : 김홍덕

빚(debt)



성경에는 <빚진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빚’이라고 하면 재물에 관한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으로 한정하지만 이 ‘빚’이라는 단어는 옛날부터 ‘죄’와 ‘종’과 연관이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빚(debt)은 단순히 재정적인 채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있어 의무를 맡아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 빚 혹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죄가 된다는 개념적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죄’는 실제로 debt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이 말하는 ‘죄(하말티어:자리를 벗어나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준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하시는 바가 있고, 목적하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과 삶의 의미는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떠나버렸기에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처럼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빚은 존재의 목적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나고 살고 있지 않다면 분명히 자신을 존재하게 한 이가 바라는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 할지라도.(물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스마트폰은 우리가 전화를 하고 인터넷 서핑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고 삽니다. 그렇다는 것은 스마트폰은 그 제조자나 구매자에게 좋은 전화품질과 빠른 인터넷 사용을 제공할 목적을 가집니다. 만약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죽었다, 맛 갔다, 고장 났다.’고 합니다.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망



죄는 곧 목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옛날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을 하는 군인이나 나라는 자신의 의를 관철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면 그 목적을 관철시킬 수 없게 됩니다. 그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국민으로서, 군인으로서의 모든 의미가 사라집니다. 곧 사망이라는 의미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다고 해도 다 종이 됩니다. 전쟁에서 지나, 채무를 갚지 못하거나 종이 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사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사망은 외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시계가 멀쩡해도 시간을 알려주어야 할 목적을 이행할 수 없게 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은 목적을 상실하면 생물학적으로 또는 의학적으로 아무리 살아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사망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과 죽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이가 가진 존재의 목적이라는 빚이 있는데, 이 빚을 갚는 것, 그 지은 이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상태가 바로 자기 존재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죄인 것이고,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는 존재의 목적을 이행할 수 없는 상태, 곧 죽음이요 사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란 어떤 목적 아래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또는 사람이 만든 물건이든, 그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지은 이나 만든 이나 소유한 이가 기대하는 목적 아래 있으면 그 목적이란 빚을 갚는 종이 되는 것이고, 그 목적의 자리를 떠나서 죄 가운데 있게 되면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구의 종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종은 어차피 자기 존재의 목적과 생사여탈의 권한을 주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존재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행하는 사람, 그 목적대로 사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의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것은 곳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 진 빚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빚을 진 것은 우리가 의도한 것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히려 은혜인 것입니다. 나는 존재할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이 나의 빚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로 여긴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빚을 지게 되었다는데 그것을 은혜로 안다? 이것은 상식적은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이것을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입만 열면 감사한다고 말할지라도 감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것이 은혜가 아닌데, 살면서 얻게 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육신이 입는 삶의 이익을 은혜나 감사로 여겨본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육신이 시험에 합격했다고? 사업에 성공하고, 아프다가 건강해졌다고? 그게 감사한 일일 되려면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은혜인 것을 알고 감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박물관에 잘 칠해져서 전시된 자동차가 아무리 차체 관리를 잘 받는다고 한 들 진흙탕을 달리는 자동차보다 감사할리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자동차는 달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란 빚을 갚기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았었는데 만유의 주재를 표현할 존재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자기 존재와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기신 목적의 빚을 갚는 신실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서 볼 때 그 목적에 빚진 자, 그리고 그 목적의 빚을 갚아나가는 종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아들이면 아들이고 종이면 종인 것일 텐데 말입니다.


실은 이것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뜻과 생각이 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육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모가 가진 생각, 생물학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보전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을 때 비로소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던 일을 이어갈 아들을 얻기 원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 와서 희석된 듯 보이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사람의 일을 직업으로만 볼 때 그런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아들을 얻으면 누구라도 자기가 하던 기업은 물론, 자기가 가진 생각과 의와 철학을 이어가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과 바람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다시 말해서 아들이 그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준행하고 살 때 아버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입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타나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란 어떤 신이고 존재인지를 표현해야겠다는 의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과 뜻과 의를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존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만물이고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주의 광활함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표현된 것이고, 자연의 놀라움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형상이란 모양이 아닙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들입니다. 딱 보았을 때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들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그렇게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삶을 사는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의 모습과 오신 목적이 나의 모습이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또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고 아들인 것은, 존재의 목적 안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사는 존재의 정체성은 다름이 아닌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알고 그 안에서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도 하고 또한 아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패자로서의 종이 아닙니다. 이 종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삶은 진정한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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