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세상은 하나님의 적으로서 인식이 됩니다. 그래서 공중권세 잡은 자, 곧 마귀와 하나님이 싸우신다고도 합니다. 물론 그 실체는 하나님이 마귀와 fighting 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사람이 어디에 속할 것인지에 대한 다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세상이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가져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마귀도 하나님의 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 무엇이라도 인간이 그 개념을 정립할 수 있는 존재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능력을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인간 인식 너머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세상이 대적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으로서 하나님 의의 본질이 아니라 그 표현된 형식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본질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의 모습과 법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지 않았는데 눈에 보이는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정하신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를 떠나서 보니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여겨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자꾸 더하려 했습니다. 그 시작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서 본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께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되어서 더 좋은 것으로 입고 행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 가려하고 그렇게 될수록 더 영광스럽다고 하고 더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가치관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과는 반대가 되는 생각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를 벗어난 죄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 의로움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이 본질로 생각하고 보니 그대로는 부족해 보여서 자꾸 뭔가를 더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이고,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죄악 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안목, 그리고 그 안목이 만든 세상이 바로 죄악 된 세상인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본질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세상과 사람을 본질로 아는 안목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르고 육신의 한계를 극복할수록 더 의로운 것이라 여기는 세상의 안목을 의로 여긴 상태에서 사는 것이 죄이기에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서 쓸모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이 되고 죽을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사망의 것이라고 깨닫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세상의 가치를 버진 죄인이 되는 것이니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죄악으로 여기고 그것을 버리므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죽은 자가 된 사람은 하나님이 볼 때 너무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피라미드의 꼭대기 높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더 가공하여 행동이나 소유가 늘어나고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사람의 자리가 온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정이 되려면 온전한 인생의 모습이 무엇인지 전해준 것을 자시의 모습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인생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기가 이때가지 의로 여겼던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사람이 자기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전한 존재라고 인정할 때 죄인이 되어 죽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의와 뜻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자신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온전히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산 시계가 시간이 맞으면 살았다고 하고,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면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목적 안에 있으면 산 것이고, 목적을 벗어나면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너무나 온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를 보이시니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을 삼아서 죽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을 삼아서 인생의 본 모습대로 죄인 삼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야 말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니 본때를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살리는 퍼포먼스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리라면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혼내면 되는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게 하시는 것이 더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과 순종하시므로 보이신 사람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목적하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리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보고서 그 보이신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또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려면, 이전에 가치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이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정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에서 진정한 생명이 있는 자이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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