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1) 그리스도와 함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3. 07:00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것은 신앙 안에서 아주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그래야 하고, 또 그것이 모든 신앙의 기본과 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여 년 전에 부활하셔서 승천하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 것일까요? 이런 질문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것이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라는 것이 아닌 것은 너무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육신의 어떤 것을 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빼면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본성이 같고 정체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주는 사과는 과수원에서 재배되고 있는 사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과 한 알이 떨어져 있어도 그 사과는 사과와 함께 하는 것이고, 사과 안에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역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과 내 삶의 본질이 같다고 인정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과 합하여(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이 바로 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믿음의 과정이고, 예수님의 죽고 살아나심으로 자기가 구속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의 보편적 교리와 같이 여기지만 그렇게 그 보편적 교리와 같은 일이 자기의 사건이 되려면 절대적인 조건이 충족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같은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 또 그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려면 예수님과 같이 죽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이 죽으려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사형수가 되어야 하고, 또 그 죽는 죄목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려면 예수님과 같은 죄인이 되어야…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공하려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단지 일부의 신앙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으셨던 이유가 자기에게도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가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죽으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어야 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같이 다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일이며, 그 예수님의 정체성에 자신이 속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그의 죽으심에 연합하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어야 하고, 나의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 사업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신 은혜고 영광이며, 세상의 방식대로 경쟁한 시험이나 경쟁에서 이기게 하심도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렇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하나님께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한 신앙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자신의 것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들어가는 것



예수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예수님과 그 삶의 정체성이 동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으실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가지셨는데, 예수님과 함께,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람들이 이것과는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주변에 있는 기성교회의 기본 신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어 예수님의 죽으심과 또 살아나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자기 정체성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패한 자요, 패한 자는 종이 되어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예수님이 사형수가 되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 패한 자가 되어 남이 하지 않는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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