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1) 또 하나의 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1. 07:00 Writer : 김홍덕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율법에 대한 개념을 흐리게 한 것



우리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 곧 행위를 지켜내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인가 하면, 먼저 하나님의 법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이 생명의 본성과 같이 있어서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었을 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는데 그와 반대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시도, 곧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을 잊고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이 육신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그런 마음 때문에 자꾸 뭔가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율법이 정죄를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잊고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주신 이 인생의 모습과 육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보고서 그것을 자기 기준으로 바로잡고자 생명이 표현되는 법인 율법을 하나님의 법과 다르게 해석하여 율법을 지켜서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행함으로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 죄를 씻고서 의롭게 된다는 의미인데 다시 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거꾸로 세상에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은 이렇습니다. 모두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이고 의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성공의 기준, 그 의의 기준으로 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인생의 연약함을 극복하는(사실은 감추는 것) 것이 의로운 것인데, 그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의에 대하여 반역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반역이 예수님의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으면 스스로 권능으로 내려와야 하고,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육신을 가지는 것인데, 잘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하찮은 인생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반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켜내어야 하는데 지키기는커녕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님은 그 어떤 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길만한 것이 없기에 흠모할 것이 없는 존재인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며 세상에 보이시니, 육신의 능력을 극복하고 화려한 권능으로 높은 곳에 올라야 성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반역자 그 자체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할 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법으로 율법의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법, 즉 하나님의 의가 행동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모양을 보니 율법과 같더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의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심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인생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의롭게 되는 것이 인생이고 성공이며 의라고 여기며 끊임없는 노력을 하던 인생들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모습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달은 것과 같이.


그런데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는 가치관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괴변이었기에 예수님은 다시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아니라 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이 가진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실체를 보이심으로 육신을 가지고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심에도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의로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히셨다는 것은 우리가 또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므로 율법을 주신 의로움을 회복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인이 되는 또 다른 죄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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